[[분류: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분류:여진족]][[분류:옛 문자]] [include(틀:한자)] [Include(틀:한자문화권의 문자)] [목차] == 개요 == [[파일:external/www.face-music.ch/jurchenscript.jpg]] [[파일:external/www.face-music.ch/jurchen_num.jpg]] [[https://www.omniglot.com/writing/jurchen.htm]] [[https://en.wikipedia.org/wiki/Jurchen_script#/media/File:Da_Jin_huang_di_dutong_jingl%C3%BCe_langjun_xingji_%E5%A4%A7%E9%87%91%E7%9A%87%E5%BC%9F%E9%83%BD%E7%B5%B1%E7%B6%93%E7%95%A5%E9%83%8E%E5%90%9B%E8%A1%8C%E8%A8%98.jpg]] 중세 [[여진족]]들이 [[여진어]]를 표기하기위해 사용한 문자이며, [[한자]],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거란 문자처럼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로 나누어져 있다.[* 대자는 처음에 먼저 만들어진 문자, 소자는 나중에 만들어진 문자를 뜻한다. 여진 대자는 아골타가, 여진 소자는 금 희종이 만들었다.]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가 만들었고, [[금희종]]도 만드는 데 도와주었다고 한다. 대자와 소자가 있지만 거란 문자와 달리 구분하는 게 의미없거나 거의 비슷해서인지 대자와 소자가 있어도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거란 문자에서 소자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래서인지, 특히 거란 문자에서 소자와 제일 비슷하다.] 거란 문자처럼 표어문자이며, 쓰는 방법도 거란 문자와 비슷하다.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는 겹쳐서 쓰는데 이런 특징이 [[한글]]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겉보기론 별로 안 비슷해 보여도 자모음을 모아 글자 하나를 만든다는 원리는 이들 문자가 한글에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여진]]도 [[거란]]처럼 자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으나 빠른 중국화로 인하여 쓰는 사람들은 갈수록 적어졌다. [[금세종]]은 이를 우려하여 여진 문자를 사용하는 방법을 늘렸지만 결국 실패했다. 금나라, [[동하|동진국]] 등이 멸망한 이후에도 만주에 계속 있었던 여진 부족들은 여진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사용방법이 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어를 글로 적을 때는 [[몽골 문자]]로 적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몽골문자로는 여진어의 음소 전체를 적을 수가 없어 한계가 있었지만 여진문자로 적는 것보다는 익히기 쉽고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도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진 문자를 읽고 쓰는 경우가 남았기는 했다. 이후로 누르하치가 여진부족들을 통일하여 후금(청나라)을 건국했고, 후금은 금나라의 후예국이라는 계승의식을 강하게 지녔지만, 이들 또한 여진문자를 그대로 쓰기에는 한계점이 있다고 느꼈고, 이 때문에 기존 여진문자를 쓰는 대신에 [[몽골 문자]]를 개량하여 보다 익히기 쉬운 [[만주 문자]][* 한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와 달리 [[몽골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몽골 문자와 비슷하다. 몽골 문자는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서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거란 문자의 소자와 여진 문자들도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긴 했는데 한자의 영향도 받아서 형식은 한자와 더 닮았고,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는 한자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위구르 문자와 비슷했고 이런 점은 [[표음문자]]로서 더욱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를 창제하였고, 그 결과, 여진 문자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고, 학술용으로나 연구되게 되었다. == 여담 == 주로 비석, 청동 도구, 일부 그림들에 이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거란어]], [[여진어]], [[만주어]]를 번역할 줄 알며, [[거란 문자]]와 여진 문자를 번역한 자료도 있다. [[유니코드]]에 2023년 기준으로 아직 여진 문자가 등재되지는 않았다. 비슷한 포지션인 [[서하 문자]]나 [[거란 문자]][* 다만 거란 문자의 경우 일부만 유니코드 전산화가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거란 소자만 유니코드에 등재된 상태이고 아직 거란 대자는 유니코드에 등재되지 않았다.]가 등재된 것과 비교하면 아직 전산화가 지진부진한 상황이다. 다만 앞으로 거란 대자와 함께 유니코드에 등재될 계획이 잡혀있으며 문자를 할당할 공간이 미리 마련해 놓기는 했고, 2009년 이래로 여진 문자를 유니코드에 추가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문자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는 등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단 현재 여진 문자를 전산화 하기 위해서는 [[구결]]처럼 [[PUA]]를 이용해 표기하는 중이며, 장기적으로는 유니코드 사용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여진문자 비석 12기(基) 가운데 2기가 당시 [[금나라]]-[[원나라]] 땅이던 [[함경도]]에 세워졌다. 1338년 세워진 [[북청군]] 성대면 창성리의 북청 여진문자비(女眞文字碑)가 있고, 한편 12세기 중엽에 세워진 [[경원군]] 아산면 수정동의 여진문자비는 1918년 일제에 의해 경성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 세워진 [[삼전도비]]에도 여진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실은 [[청나라]] 시대에 개발된 [[만주 문자]]이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질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문자(文字)가 장차 폐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찍이 생도 6명을 설치하고 부사정(副司正) 혹은 대장(隊長)의 체아직 한 자리를 주게 하고는 오로지 이를 연습하게 하였사온데, 뒤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지에의 우거(寓居)의 곤란을 말하여, 그의 분번(分番)을 들어 주고 1년 만큼 서로 체번하게 하였던 바, 수가 적은 생도가 번을 나누어서 오르내리게 되므로, 혹은 하기도 하고, 혹은 중단하기도 하여 진실로 온당치 않사오니, 청하옵건대, 6명을 증가하여 모두 12명으로 하고, 이에 부사정·사용(司勇)의 체아직 한 자리를 더 주어서 분번(分番)을 없애고 상시 그 학업을 닦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무자 3번째 기사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에 조선에 거주하던 [[여진족]]들 중에도 여진 문자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고, 세종은 이를 보존했다고 한다. [[http://www.newswatch.kr/news/articleView.html?idxno=6394|세종대왕, 여진 문자 폐절을 막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중국 관련 문서)]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