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에드워드 7세 시대]] [[분류:러시아 제국의 역사]] [[분류:1907년 협정]][[분류:영러관계]] [include(틀:영러관계 관련 문서)] ||<-8>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8102e, #000 40%, #000 60%, #FFCC33)" '''{{{#fff 영러협상 | 英露協商}}}''' }}} || ||<-4> [[파일:영국 국기.svg|width=100%]] ||<-4>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100%]] || ||<-4>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fff 영국}}}]]''' ||<-4> '''[[러시아 제국|{{{#800080 러시아 제국}}}]]''' || ||<-2> '''[[영어|{{{#FFF 영어}}}]]''' ||<-2> Anglo-Russian Entente ||<-2> '''[[러시아어|{{{#800080 러시아어}}}]]''' ||<-2> Англо-русское соглашение || [목차] [clearfix] == 개요 ==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세력 조정을 놓고 [[영국]]과 [[러시아 제국]]이 1907년 체결한 협정. == 의의 == 19세기 판 냉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협상을 통하여 [[삼국협상]]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외교사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는다. == 과정 == === [[그레이트 게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그레이트 게임)] 러시아가 19세기 초반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부 아시아 곳곳에서 남하하면서 세력을 뻗치자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를 러시아가 탐내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강한 불안을 보였고 이에 따라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암투[* [[크림전쟁]]을 제외하면 양국간의 전면전이 발발한 적은 없었다.]가 19세기 내내 전개된다.[* 여담으로 이 그레이트 게임은 [[거문도 사건]]을 비롯해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조선]] ~ [[대한제국]]의 운명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 [[독일 제국]]의 등장 === 이렇게 영국과 러시아가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오랫동안 힘의 공백지였던 중부 유럽에서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이 등장한다. 독일 제국 창설의 1등 공신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권력을 쥐고 있을 당시에는, 기존의 열강을 자극하는 것이 독일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리고 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은 [[식민지]] 개척과 군비 확장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면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발칸 반도를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다툼을 조정해준 [[베를린 회의]]이다.] 하지만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영향력 확장으로 외교 노선을 선회하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독일 / 러시아 양국 중 하나가 [[프랑스 제3공화국|제3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전쟁시]] 중립을 지키겠다는 조약.]의 갱신을 거부하면서 러시아 지도층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이어 [[세계 정책]](Welt Politik)을 내세우면서 [[독일 제국 해군]]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며 [[영국 해군]]과의 [[건함 경쟁]]을 실시하는 한편, [[3B 정책]]을 통해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이미 [[3C 정책]]으로 영국의 [[세력권]]이었던 중동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경제적으로 독일에게 추월당하고 있다는 우려에 휩싸여있던 영국 내부에서 자신들의 2국 표준주의[* 영국 해군이 주력함 기준으로 세계 2위, 3위의 해군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해군을 보유하겠다는 영국의 해군정책]를 위협하는 이런 독일의 호전적인 외교 정책은 상당히 커다란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 체결 === 이런 상황에서 1905년 [[카자르 왕조|페르시아]]의 수도 [[테헤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샤]]를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 격하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내세운 이 봉기는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던 영국, 러시아 모두에게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오랜 앙금을 잊고 협상에 돌입한다. ~~제국주의 사이의 야합.~~ 그리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삼분할[* 북부는 러시아가, 남부는 영국이,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겨놓기로 합의됐다.]을 골자로 하는 영러 협상이 1907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결된다. == 결과 == 영러협상의 체결과 동시에 양측은 군사 협력도 진행하기로 발표했고, 기존의 [[러불동맹]], [[영불협상]]과 합쳐져 [[삼국 협상]]이 탄생하게 된다.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강대국 간 동맹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