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59년 출생]][[분류:1636년 사망]][[분류:해주 오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예조판서]][[분류:서인]]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인조-경종))]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인조-경종))]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영의정}}}]][br]충정공(忠貞公)[br]{{{+1 오윤겸}}}[br]吳允謙'''}}} || || '''출생''' ||[[1559년]] [[11월 20일]][* [[율리우스력]] [[11월 10일]].][br](음력 [[명종(조선)|명종]] 14년 10월 12일)|| || '''사망''' ||[[1636년]] [[2월 25일]] (향년 76세)[br](음력 [[인조]] 14년 1월 19일)|| || '''[[시호|{{{#fff 시호}}}]]''' ||충정(忠貞){{{#!folding [ 펼치기 · 접기 ] 충간(忠簡)^^[[현종실록]]^^[br]'''충정(忠貞)'''^^[[현종개수실록]], [[묘지명]]^^[br]문충(文忠)^^[[순조실록]]^^}}}|| || '''[[본관|{{{#fff 본관}}}]]''' ||[[해주 오씨]]|| || '''[[자(이름)|{{{#fff 자}}}]]''' ||여익(汝益)|| || '''[[아호|{{{#fff 호}}}]]''' ||추탄(楸灘)|| || '''부모''' ||부친 - 오희문(吳希文, {{{-3 1529 ~ 1613}}})[br]모친 - [[연안 이씨]] 이인순(李仁順, {{{-3 1540 ~ ?}}})[* [[성종(조선)|성종]]의 9남 [[익양군]]의 외손녀.]|| || '''형제자매''' ||'''4남 2녀 중 장남'''[br]남동생 - 오윤해(吳允諧, {{{-3 1562 ~ ?}}})[br]남동생 - 오윤함(吳允諴, {{{-3 1570 ~ ?}}})[br]여동생 - 오숙란(吳淑蘭, {{{-3 1572 ~ ?}}})[br]남동생 - 오윤성(吳允誠, {{{-3 1576 ~ ?}}})[br]여동생 - 오숙진(吳淑眞, {{{-3 1579 ~ ?}}})|| || '''[[부인|{{{#fff 부인}}}]]''' ||{{{-2 정부인}}} [[경주 이씨]] - 이응화(李應華)의 딸[br]{{{-2 계부인}}} [[덕수 이씨]]|| || '''자녀''' ||'''5남 5녀'''[br]{{{-1 [ 경주 이씨 소생 - 2남 2녀 ] }}}[br]장녀 - 오정임(吳正任, {{{-3 1585 ~ ?}}})[br]차녀 - 오절임(吳節任, {{{-3 1596 ~ ?}}})[br]장남 - 오달천(吳達天, {{{-3 1598 ~ ?}}})[* [[오명항]]의 증조부.][br]차남 - 오달주(吳達周, {{{-3 1600 ~ ?}}})[br]{{{-1 [ 덕수 이씨 소생 - 3남 2녀 ] }}}[br]4녀 - 오명임(吳命任, {{{-3 1602 ~ ?}}})[br]3남 - 오달조(吳達朝, {{{-3 1604 ~ ?}}})[br]4남 - 오달원(吳達遠, {{{-3 1607 ~ ?}}})[br]5남 - 오달사(吳達士, {{{-3 1611 ~ ?}}})[br]5녀 - 오임정(吳任貞, {{{-3 1618 ~ ?}}})[br]{{{-1 [ 측실 노비 진옥(眞玉) 소생 ] }}}[br]3녀 - 오애임(吳愛任, {{{-3 1598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문신]]. == 생애 == 아버지는 [[쇄미록]]을 기록한 오희문이고, 어머니는 문천군수 이정수와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연안 이씨]]이다. 즉 오윤겸은 익양군의 증손자가 된다. 오윤겸은 다른 인재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나진 않았다. 20대에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36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 제도#문과|전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것도 갑과, 을과도 아닌 병과였다. 그 전에는 [[능참봉]]이나 송강 [[정철]]의 [[종사관]] 같은 미관 말직에 종사했다. 그가 등과하는 1595년은 [[임진왜란]] 중이었고, 그와 동세대인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미 [[대사헌]]을 거쳐 참판, [[판서]]를 다는 [[당상관]]이었다. 사실 오윤겸은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과거 시험을 보기는 했는데 과거 시험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시하지 않고, 다 써 놓은 답안지에 다른 사람이 실수로 [[먹물]]을 쏟아도 [[대인배|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평강군|평강]]현감으로 있을 때 우연히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야사에 따르면 정철이 [[이산해]]에게 사윗감을 구해달라고 해서 오윤겸을 추천했더니 이산해는 사위 이덕형과 같은 준재를 고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오윤겸과 같은 답답한 인간을 소개해주냐고 절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대인(待人)과 접물(接物)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보수적인 성격이지만 유화스럽게 상황을 이끌어나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는 또한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당대 가장 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오윤겸의 벼슬 운은 전쟁이 지나고나서도 순탄치 않았다. 전후에도 [[북인]] 공세기는 지속되었고 이때 그는 [[성혼]]을 변호하다가 [[함경도]] [[경성군|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으며,[* [[영의정]]이었던 이항복도 이 일 때문에 물러났다.] [[평안도]] [[안주시|안주]] [[목사]], [[경상도]] [[동래]] [[부사]]를 전전해야했다. 오윤겸이 돌아온 것은 [[광해군]] 때(1610년)였지만, 당상관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묘]] 배향 문제로 물러난다. [[조식(조선)|조식]]의 문하로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하던 [[정인홍]]과 부딪쳤던 것이다.[* 정인홍이 좀 무리를 한것은 사실이다. 차라리 조식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이언적까지 몰아 공격하다가 명분을 많이 잃게 되었다.] 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1613년 계축 옥사로 [[인목대비]]의 지친들이 대거 잡혀들어가자 스스로 외직을 자처했다. 이렇게 지방관의 세월이 길다보니 이때의 업적이 더 많다.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고, 세금을 줄여주거나 인사를 청렴하게 수행하였다는 평을 받는 [[청백리]]였다. 이후 정3품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이 해 1617년(광해군 10년) [[조선 통신사]]로 다녀와 포로 송환에 기여했다. 이때 풍랑으로 죽을 뻔했고, 북인의 득세가 계속되자 다시 물러났다가 1622년(광해군 14년)에 다시 [[명나라]] [[천계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에 해로로 갔다가 풍랑으로 또 죽을 뻔했다. 특징은 서인이면서도 계속 북인 정권과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면서도 궂은 일은 도맡아 했다는 것. 이렇게 광해군 조정에서 오래 일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공신이 아닌데도[* 공서파가 아닌 청서파였다는 이야기다. 그 이전에 광해군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고.]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제서야 외직과 사신을 전전하던 60대의 오윤겸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판서를 역임한건 물론이고, [[이괄의 난]]에서 왕을 [[공주시|공주]]까지 호송한 이후로 [[우의정]]에 올랐다. [[정묘호란]]에는 [[인목대비]]와 [[인열왕후]]를 [[강화도]]로 호송했으며, 기어이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가 추진하는 생부 [[정원군]]의 원종 [[추존]]을 반대했다. 사실 이건 [[이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서인들이 반대했던거긴 하지만 여하간 할 소리는 하면서도 좌천당하진 않았다. 오윤겸은 서인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했다. 그래서 오윤겸은 남인 같은 서인이고, [[이수광(조선)|이수광]]은 서인 같은 남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오윤겸과 이수광은 폐모론에 반대하며 외직을 떠돈 점, 그런 소수파였음에도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점,[* [[지봉유설]]은 이때의 작품이다.] 이수광 역시 광해군 시절 명의 사신으로 [[마테오 리치]]와 자주 접했다는 점,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같이 인조를 호송했다는 점 등 여러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이수광이 정묘호란 직후(1628년) 이조 판서의 자리에서 사망해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다.[* 맏아들 이성구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이 된걸 보면 아마 이수광이 장수했다면 정승이 되고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성구 역시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항복의 송덕비를 북청 땅에 세워주어 북인의 미움을 사 유배된 전력이 있다.] 이후 좌의정을 역임하다가 [[병자호란]] 전에 죽었다. == 여담 == 오윤겸의 아버지와 조카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아버지는 조선 중기 민간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중요한 일기 [[쇄미록]](보물 1096호)을 남긴 오희문이고, 조카는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다. 병조좌랑과 부교리를 지내고 [[청나라]]에 끌려가 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오달제는 이 공로로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해주 오씨]] 추탄공파가 그의 후손들이다. 유명 인물로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오신환]]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