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보헤미아 국왕)] [include(틀:역대 오스트리아 공작)] [[파일:Ottokar_II_Premysl.jpg]] [목차] == 개요 == [[체코어]]: Přemysl Otakar II 생몰기간 : [[1233년]] ~ [[1278년]] [[8월 26일]] 재위기간 : [[1253년]] [[9월 23일]] ~ [[1278년]] [[8월 26일]]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3대 국왕. [[대공위시대]]를 이용해 보헤미아 왕국을 확장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 제후들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에게 패사하여 보헤미아 왕국을 강국으로 끌어올려던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 생애 == [[메스체크 크랄로베]](Městec Králové)에서 [[바츨라프 1세]]와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 쿠니군데(Kunigunde von Staufen 1202~1248)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형 블라디슬라프가 있어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1247년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248년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왕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파문]]을 당해 사기가 꺾이며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부자간의 사이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면서 공위 상태가 된 [[오스트리아 공국]]을 얻으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개선되었고, 1251년 석방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초빙을 받아 오스트리아 공작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국을 프르셰미슬 왕조의 확고한 영지로 만들고자 바벤베르크 가문 출신의 여인으로 프리드리히 2세 호전공(Friedrich II. der Streitbare 1211~1246)의 누나인 마르그레테(Margarethe von Österreich 1204~1266)와 결혼했다. 1253년 부왕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듬해에는 [[콘라트 4세]]가 죽자 [[독일왕]]위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을 도와 [[발트해]]의 [[고대 프로이센]]인을 상대로 한 [[십자군 전쟁/기타 십자군#s-1.6|십자군 원정]]에 2차례 참여했으며, 튜튼 기사단은 오타카르 2세의 지원을 기념하여 '왕의 산'이라는 의미의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를 세웠다. 보헤미아 왕국의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벨러 4세]]는 바이에른 공국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맏아들 [[이슈트반 5세|이슈트반]]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으로 앉히려 했다. 헝가리 왕국과의 분쟁은 1260년 해결되어 벨러 4세는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포기하는 대신 오타카르 2세는 마르그레테와 이혼하고 벨러 4세의 외손녀인 [[루테니아 왕국|할리치나]]의 쿠네훈다(Кунегунда Ростиславна 1245~1285)와 결혼했다. 1266년에는 에거란트(Egerland 현재 [[체코]] [[헤프]])를 획득했으며 1268년에는 [[케른텐 공국]]을 통치하던 슈판하임 가문의 울리히 3세(Ulrich III. von Spanheim 1220~1269)와 상속 협정을 맺어 [[케른텐 공국]], [[카르니올라 공국|크라인 변경백국]]과 빈트 변경백국을 획득했으며 1272년에는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프리울리]]까지 영토를 넓혔다. [[대공위시대]]를 이용해 정점에 섰던 오타카르 2세는 대립왕이었던 콘월의 리처드(Richard of Cornwall 1209~1272)[* [[잉글랜드 국왕]] [[존 왕]]의 아들로 [[헨리 3세]]의 동생.]가 사망하자 다시 한 번 [[독일왕]]위에 도전했다. 그러나 독일인도 아닌 [[체코인|보헤미아인]]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독일인 제후들은 [[스위스]] [[아르가우]]의 한미한 촌구석인 [[합스부르크]] 일대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를 [[루돌프 1세]]로 선출했다. 오타카르 2세는 루돌프 1세를 독일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교황]]에게 루돌프 1세를 인정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나 역시 대공위시대에 질린 [[그레고리오 10세]]는 루돌프 1세의 선출을 인정했다. 1274년 11월, 루돌프 1세의 주최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 사망 이후 바뀐 신성 로마 제국의 모든 경계를 원상복구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 조치로 오타카르 2세는 케른텐, 크라인, 빈트 변경주, 프리울리를 모두 상실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를 더욱 압박하여 이듬해 오타카르 2세에게 제국 추방령을 선언했고,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던 그의 거처인 [[호프부르크]]를 포위했다. 이 사이에 보헤미아에서 팔켄슈타인의 자비시(Záviš z Falkenštejna 1250~1290)가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1276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권리까지 포기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바만 유지하며 아들 [[바츨라프 2세|바츨라프]]와 루돌프 1세의 딸 유타(Jutta von Habsburg 1271~1297)를 결혼시키는 조약에 서명했다. 루돌프 1세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무력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오타카르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마이센 변경백국, 소폴란드 공국에서 [[용병]]을 빌려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루돌프 1세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 동맹을 맺고 빈으로 진군했다. 1278년 8월 26일, 빈 북쪽 뒤른크루트(Dürnkrut)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오타카르 2세는 전사했다. 그가 생전에 이룩하려 했던 모든 꿈은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고, 루돌프 1세는 그의 유해를 수습해 빈의 미노리텐 교회에 안장해주었다. 보헤미아 왕위는 당시 6살이던 아들 바츨라프가 [[바츨라프 2세]]로 즉위하여 승계했다. 빈에 묻혔던 유해는 바츨라프 2세의 노력으로 반환되어 [[프라하]]의 성 비타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분류:보헤미아 국왕]][[분류:모라비아 변경백]][[분류:오스트리아 공작]][[분류:프르셰미슬 가문]][[분류:1233년 출생]][[분류:1278년 사망]][[분류: 프라하 출신 인물]][[분류:성 비타 대성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