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utun }}}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프랑슈콩테]] 주에 위치한 도시. [[디종]]에서 서남쪽으로 40km, [[브장송]]에서 서쪽으로 80km, [[비시(프랑스)|비시]]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리옹]]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소규모 도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건설되기 전에는, 약 15.5마일(25km가량) 떨어진 곳에 켈트족이 거주하던 비브라크테(Bibracte)가 근방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지배에 반대하여 갈리아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실패로 돌아가고 그 우두머리인 베르생제토릭스가 항복한 뒤, 로마인들은 [[괘씸죄|봉기의 흔적이 남은 옛 도시는 몰락해 버리도록]] 상기한 것처럼 25km밖에 안 떨어진 곳에 로마인들의 새 도시를 만들어 비브라크테를 대체해 버렸다. 이것이 아우구스투눔(Augustodunum), 현재의 오툉이다. 현재까지도 성벽, 극장 등 로마 유적이 남아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 라자르 대성당이 대표적 관광지이다. 제정 후반기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도시로 유명해졌다. 게르만 이동기인 356년에 [[알레만]] 족의 침입으로 도시가 포위되었으나 당시 서방 부제였던 [[율리아누스]]가 지원에 나서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던 오툉은 725년에 [[사라센]] 해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이후 소규모 도시로 전락하였으며, 현재는 인구 1만 4천의 소도시이다. 가끔 한국을 순회공연차 방문하는 [[파리 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에 선발된 어린 단원들이 교육을 받는 기숙학교가 이 도시에 위치해 있다. 오툉에서는 589년, 670년, 1065년, 1077년, 1094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부르고뉴 일대의 주교들이 모인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탈레랑]]이 한때 이곳의 주교였다. 여담으로 한국인이 한글 표기대로 발음하기가 매우 힘든 프랑스어 단어이다.[* 실제 발음은 오땅에 가깝다.] [[분류:프랑스의 코뮌]][[분류:부르고뉴프랑슈콩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