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옥인찬}}}'''[br]'''玉仁讚'''}}}}}}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옥인찬.jpg|width=100%]]}}} || || '''본관''' ||[[의령 옥씨]][* 학생공파(學生公派) 23세 인(仁) 항렬.] || ||<|2> '''출생''' ||[[1917년]] [[3월 4일]] || ||[[중화민국]] [[상하이]] || || '''원적'''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 대흥면 구리[* [[http://db.history.go.kr/id/hd_001r_0010_0010|1911년 105인 사건 당시 제1회 공판시말서]]에 아버지 옥성빈의 출생지가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 대흥면(大興面) 구리(九里)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19&evntId=0034970469&evntdowngbn=Y&indpnId=000000292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평양부 융흥면 9리 등으로 각각 기재되어 있는데, 어쨌든 대흥면과 융흥면 모두 '구리 또는 9리'라는 지명이 없었으므로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현재 어느 행정구역으로 변모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br](현 [[평양시]] [[중구역]]) || ||<|2> '''사망''' ||[[1994년]] [[9월 21일]]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성악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17년 3월 4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아버지 옥성빈(玉成彬, 1885. 2. 26 ~ 1933. 12. 18)[* 1885년 2월 26일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 대흥면 구리(현 [[평양시]] [[중구역]])에서 아버지 옥윤혁(玉潤赫, 1863. 10. 20 ~ 1929. 12)과 어머니 [[강씨]](姜氏, 1862 ~ 1938. 1. 17)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황해도]] [[수안군]] 연암면 입응동(현 [[황해북도]] [[연산군(황해북도)|연산군]])으로 이주해 회사 서기로 근무했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19&evntId=0034970469&evntdowngbn=Y&indpnId=000000292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으나]] 이에 공소하여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05&evntId=0034973604&evntdowngbn=Y&indpnId=000000585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도 같은 혐의에 대해 [[무죄]]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19&evntId=0034970469&evntdowngbn=Y&indpnId=000015057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출옥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수감 경력이 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당시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 공부국(工部局) 경찰청에서 조선인계로 근무했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 피살사건]]으로 6촌 재종제 옥관빈(玉觀彬, 1890. 1. 18 ~ 1933. 8. 1)이 암살당한지 4개월 뒤인 12월 18일, [[상하이시|상해특별시]] [[조계|프랑스 조계]] 맥새이체라로(麥賽爾蒂羅路)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12260020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2-26&officeId=00020&pageNo=2&printNo=4685&publishType=00020|암살당했다]]. 이렇듯 부친과 7촌 재종숙 옥관빈의 피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음에도 옥인찬은 후술하듯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하였다.]과 어머니(1890. 7. 7 ~ ?)[* [[본관]]과 성명은 알 수 없고, 다만 아버지의 이름이 문성(文成)인 것만 알 수 있다.]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여운형]] 등이 설립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944|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와 중국계 중학교, [[푸단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8살에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음악과 인연을 맺었고,푸단대학 시절에도 방과후에 성악가 슈스린과 상해음악학교 교장 사자핀을 사사하는 등 성악공부를 병행했다. 그 뒤 성악가로서 활동하다가 1944년 [[중화민국]] [[하남성]] [[상추시|상구현]](商丘縣) 귀덕로(歸德路)[* 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상추시]] 량위안구(梁園區) 구이더로(歸德路).]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 특파 지하공작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95|김병환]](金秉煥)에 포섭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고, 이듬해인 1945년 광복군 제3지대가 정식 편성되면서 부대원들의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순국선열 추도가' '혁명군 행진곡' 등을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순국선열 추도가'는 1993년 '선열추념가' '독립지사의 노래' '애국지사의 노래' 등과 함께 당시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60|안태국]](安泰國),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50|김인전]](金仁全)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국선열 5위 봉환 국민제전에서 부르게 될 조가(弔歌) 후보에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8/10/1993081073005.html|오르기도 했다]].[* 당시 최종 후보작은 1920년대 만주 독립군추도식에서 사용됐던 [[https://youtu.be/AvtbO7QG_xM/|선열추념가]]가 채택되었다.] [[8.15 광복]] 후 광복군 제1지대 출신인 이소민(李蘇民)[* [[김원봉]]의 측근이며 [[조선의용대]] 출신이다. 1945년 10월 [[중국 국민당]]에 체포되어 20일간 구류되었고, 1946년 귀국해 [[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하다 월북, [[6.25 전쟁]] 당시 중국에서 [[조선인민군]]의 후방업무를 맡았다. 그 후 행적이 불분명한데,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이 한국광복군 주호 판사처 주임을 자처하며 상해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보고를 접하고 [[김학규]]의 휘하에서 [[김우전]], [[박승헌]], [[전이호]], [[한이윤]] 등과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에서 근무하였다. 귀국 후 1946년부터 성악가로 활동하여 [[홍콩]]에서 독창회를 열기도 하였고, 성악가 이인선의 문하생 발표회에 객원가수로 초청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인연으로 성악가 이인선이 주도한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였고, 1948년 2월 [[부민관]]에서 국내 최초의 오페라 공연인 [[라 트라비아타]] 초연에 조르주 제르몽 역을 맡았다. 이후 [[미군부대]]와 관계되는 토건업에 종사하다가 1949년에는 과로로 인한 [[황달]]을 치료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가 수 개월 간 요양하였다. 1950년 다시 귀국한 그는 오페라 [[카르멘]]에 출연하였고 세 번째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을 맞았다. 당시 오페라 공연 준비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서북청년단]]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피난했다. 부산 피난 후 [[미8군]] 심리작전국에 근무하며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통역관으로 2년간 있었고, 1952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호 프랑스 유학생으로 리옹대학에 유학하면서 1년간 [[국제법]] 강의를 수강하였다. 1953년 귀국길에 잠시 [[일본]] [[도쿄]]를 들러 미국인 지인을 만난 그는 지인을 통해 국제검사시험공사(INTECO) 부산지점 책임자 자리를 알선받았고, 이에 응해 귀국 후 수출입상품 검사 및 공증 업무를 하면서 1954년 [[진해]] 반공회의에서 [[베트남 공화국]]대표의 프랑스어 통역을 담당했다. 1957년 국제검사시험공사 방콕지점 매니저로 전근하면서 [[태국]] [[방콕]]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50200329203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5-02&officeId=00032&pageNo=3&printNo=9720&publishType=00020|이주했다]]. 이때 국제농산물검사원 자격을 얻은 그는 방콕 이주 후 태국 교민회장을 역임하였고, 1959년 사직하고 [[태국인]] 지인과 함께 '타이 프라스티'라는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1961년에는 방콕에 한국 음식점인 '아리랑식당'을 개업했는데, 이때 태국 제9대 국왕 [[라마 9세]]의 탄신일 연회에 한국음식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구절판]]을 국왕 앞에서 요리해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64년부터는 한국예술문화진흥회와 제휴해 '코리언·쇼'를 방콕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4101000329206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4-10-10&officeId=00032&pageNo=6&printNo=5839&publishType=00020|후원해]] 문화, 예술계에도 족적을 남겼다. 그 뒤 아리랑식당은 경영에 차질이 생겨 곧 폐업했고, 개인 농산물검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태국인과 동업하던 '타이 프라스티' 회사 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대신 방콕 시내에 '서울 레스토랑'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50300329203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5-03&officeId=00032&pageNo=3&printNo=9721&publishType=00020|개업해]] 경영하는 한편, 매년 자선독창회를 열어 태국에 한국 음악을 알리는 민간사절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42700329203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4-27&officeId=00032&pageNo=3&printNo=9716&publishType=00020|활약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1982년에는 한국광복군 시절 동지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73|박노일]](朴魯一)의 아내 곽영숙(郭英淑) 여사가 독립군가보존회를 운영하며 독립군가를 수집하자 자신이 한국광복군 복무 당시 직접 작사, 작곡한 '혁명군 행진곡', '순국선열 추도가'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0081500239119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0-08-15&officeId=00023&pageNo=19&printNo=21367&publishType=00010|채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1994년 9월 21일 현지에서 별세하였다. == 가족관계 == * 아버지 옥성빈과 7촌 재종숙 [[옥관빈 피살사건|옥관빈]](玉觀彬, 1890. 1. 18 ~ 1933. 8. 1)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경력이 있던 독립운동가로, [[중국]] 거주 당시 실업가로 유명했다. * 둘째 남동생 옥인걸(玉仁傑, 1932. 1. 6 ~ )은 옥관빈 피살사건 이후 모친과 함께 귀국하여 [[평양]]에서 학교를 마치고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20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고, [[매사추세츠 대학교|매사추세츠 대학교 로웰 캠퍼스]]에서 [[성악과]] 교수를 역임했다. 음역대는 [[테너]]로 [[세종문화회관]] 개관공연에도 참여한 바 있다. * 조카[* 첫째 남동생 옥인원(玉仁源, 1929. 9. 26 ~ )의 아들이다.]인 옥상훈(玉庠勳, 1963. 5. 4 ~ )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성악가이며 현재 [[국민대학교]] 음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한국의 성악가]][[분류:바리톤]][[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상하이시 출신 인물]][[분류:의령 옥씨]][[분류:1917년 출생]][[분류:199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푸단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