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북사)] [include(틀:주서)] [목차] 王盟 (? ~ 545) == 개요 == [[남북조시대]] [[북위]], [[서위]]의 인물. 자는 우(仵)[* 『[[북사]]』.] 또는 자우(子仵)[* 『[[주서]]』.], 시호는 효정(孝定). 왕맹의 선조는 [[낙랑군]] 출신으로, 낙랑군 수성현 출신 [[왕정(북위)|왕정]] 형제와 조상이 같다. [[서위]] 추존 황제 [[우문태]]의 모친 명덕태후 왕씨의 오빠다. == 생애 == 북위 정강 5년(524)에 파륙한발릉(破六韓拔陵)[* '파륙한'이 성씨고, '발릉'이 이름이다. [[내몽골]] 지역 출신.]이 [[육진의 난]]을 일으켜 여러 진이 함락되는데, 왕맹도 여기에 낀 바 있었다. 이듬해 525년 파륙한발릉이 패하고 북방으로 돌아가자 왕맹은 고향을 떠나 중산에서 임시로 거주한다. 이후 효창 연간(525~528) 초에 바로 적사장군으로 복직하고 옹주자사 소보인(蕭寶夤)의 서정을 따른다. 효창 3년(527) 이번에는 소보인이 반란을 일으키니, 왕맹은 백성 사이로 숨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본다. 집권한 [[이주영(북위)|이주영]]이 반란과 [[양(육조)|양]]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생 이주천광이 입관하자 그를 따른다. 왕맹은 선봉 하발악(賀拔岳)을 따라 묵기추노(万俟醜奴, 또는 만사추노)를 사로잡고 [[산시성(섬서성)|진롱]](秦隴)을 평정한다. 공을 세운 왕맹은 정서장군 평진군수에 임명된다. [[우문태]]가 후막진열(侯莫陳悅)을 토벌할 때 왕맹은 원주자사 대도독에 임명돼 원주(原州)로 보내진다. [[효무제(북위)|효무제]]가 장안에 이르러 우문태와 합류한 뒤에는 위창현공 읍 1천호에 임명된다. 서위 초에 다시 거기대장군 의동삼사가 더해진다. 대통 3년(537)에는 [[사공]], [[사도]]를 역임하고 [[문제(서위)|서위 문제]]가 [[유연]]에서 욱구려씨 황후를 맞이한 뒤에는 시중이 더해지고 [[태위]]로 옮긴다. 유후 대도독 행옹주사로서 관중의 여러 군사를 절도(節度, 통솔)했다. 조청작(趙青雀)의 난 때는 [[이호(북주)|이호]]와 함께 태자를 보호했다. 난이 평정된 뒤에는 장락군공(長樂郡公)에 봉해지고 읍 2천석이 더해졌으며 성씨를 받는다. [[동위]]가 분천(汾川)에 침입하자 좌군대도독으로 이를 막았고 [[태보]]에 임명된다. 대통 9년(543) 태부로 승진하고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진다. 왕맹은 문제로부터 존중을 받았는데, 병석에 누운 뒤에는 문제가 친히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러 올 정도였다. 대통 11년(545) 죽으니 [[본관]]과 함께 시호가 하사된다. 본인은 [[북주]] 건국 전에 죽었으나 우문씨를 도와 서위에서 활약했기 때문인지 후일 [[주서]] 열전에 이름을 올린다. == 가족관계 == * 조부: 왕진 * 부: 왕비 * 형 * 조카: 왕현 * 종손: 왕의 * '''본인: 왕맹''' * 아들: [[왕려]] 또는 왕매 * 손자: 왕필 * 아들: [[왕무(서위)|왕무]] * 손자: 왕열 * 여동생: 명덕황후 왕씨 * 매부: 우문굉 * 외조카: [[우문태]] [[낙랑 왕씨]]의 일원으로 왕파의 6세손이다. 왕맹의 장남 [[왕려]](王勵) 또는 왕매(王勱)는 26세에 요절했고 함양군공에 추봉된다. 그 아들 왕필이 승작했고 후일 서위 안락공주와 혼인한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45년 사망]][[분류:낙랑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