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북사)] [include(틀:주서)] [목차] 王羆/王碑 (? ~ 541) == 개요 == [[북위]]·[[서위]]의 인물. 자는 웅비(熊羆), 시호는 충(忠). 경조군 패성현 사람으로, [[전한]]대 하남윤을 지낸 왕준(王遵)에서 비롯된 경조 패성의 유력 가문(著姓) 출신이다. == 생애 == 북위 태화 연간(477~499) 중반에 전중장군에 올랐다. 일찍이 북위의 남기주와 동익주에서 [[강족]], [[저족]]이 난을 일으켰는데, 북위군이 패하고 진압에 실패한 일이 있었다. 왕비는 명을 받고 우림군 5천을 이끌고 양주에 나가 진을 쳤고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우장군 서하내사에 임명됐으나 왕비는 관직을 사양했다. 누군가 관직을 사양한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수도의 재목이 서하로 나가버리면 조정 귀족으로 집을 경영하는 자가 모두 빌려주려고 할 것이다. 그에 맞추기 위해 사적으로 비용을 마련해야 하나 당장 감당할 힘이 없으니, 백성들에게서 과발(科發, 인력이나 재물을 탈취해 모음)하는 것과 같고 또한 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사양한 것이다.[* 京洛材木, 盡出西河, 朝貴營第宅者, 皆有求假. 如其私辦, 即力所不堪, 若科發民間, 又違法憲. 以此辭耳.] 라고 했다. [[양(육조)|양]]의 장군 조의종이 [[형주]]를 포위하니 조서를 받고 별장 배행과 병사를 이끌고 구원했고, 뒤이어 형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이 공으로 형주자사에 임명되고 호모군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정양자(定陽子)에 봉해졌다. 조의종이 다시 군사 수만을 이끌고 형주를 포위하고 수공을 해 큰 피해를 입었다. 북위에서는 전국이 혼란스러워 원군을 보낼 수 없었고, 왕비와 휘하 군사들은 죽을 끓여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왕비는 갑옷과 투구도 걸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지만, >형주성은 [[효문제|효문황제]]가 설치한 것이다. 하늘이 만약 나라를 돕지 않는다면 도적들로 하여금 나에게 화살을 적중시키도록 하고, 그렇지 않다면(하늘이 나라를 돕는다면) 내가 반드시 적을 격파하리라![* 荊州城, 孝文皇帝所置. 天若不祐國家, 使賊箭中王羆; 不爾, 王羆須破賊.] 라고 크게 외치고는 양군과 여러 번 맞붙었으나 부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 조의종은 형주성 공성에만 3년을 끌다 결국 퇴각했고, 왕비는 형주를 지켜낸 공으로 패성현공으로 진봉됐다. 529년, 북해왕 원상의 아들로 [[헌문제]]의 손자인 원호가 낙양에 입성해 황제를 자칭했을 때 좌군대도독에 임명됐다. 원호가 패하자 [[효장제]]는 왕비가 원호에게서 받은 관직을 회수했다. 남진주에 반란이 일어나자 행남진주사에 임명돼 수괴들을 참했다. 왕비는 조서를 받들어 경주자사[* 주서에서는 거기대장군 경주자사. 북사에 따르면 행진주사에 임명되고 경주자사로 관직이 바뀐 것으로 거기대장군에 임명되는 것은 뒤의 일이다. 뒤의 관직들도 양 사서에서 모두 서로 차이가 있다.]로 임명됐다. 임지 경주(涇州, [[간쑤성]] 징촨현)에 향하는데 [[우문태]]가 거병했음을 전해듣고 선봉에 서기를 청했다. 왕비는 대도독에 임명되고 화주에 주둔했다. 534년 우문태가 도망쳐온 [[효무제(북위)|효무제]]를 보호하자 거기대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하고 별도로 만년현백에 봉해졌으며, 이후 화주자사로 옮긴다. 군대를 이끌고 동관을 습격한 [[동위]]의 승상 [[고환(남북조시대)|고환]]을 패퇴시켰고, 표기대장군에 제배되고 시중, [[개부의동삼사|개부]]가 더해졌다. 고환은 한궤, 사마자여 등을 화주성에 보내 성문을 넘게 했다. 화주성은 성벽을 짓느라 밖에 사다리가 걸려 있었고, 왕비가 깨닫지 못하는 새벽중에 한궤 등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었다. 누워있던 왕비가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듣고 웃통을 벗고 머리는 산발인 채 맨발로 뛰어나가, 손에 든 일백봉(一白棒)을 휘두르며, >늙은 왕비가 길을 막고 누워있는데, 오소리 새끼가 어찌 지나갈 수 있겠느냐! [* 老羆當道臥, 貉子那得過!(북사)][* 老羆當道臥, 貆子安得過!(주서) 주서에서는 사원 전투에서 고환에게 한 말이다.] 라고 외치니 한궤 등은 놀라 동문까지 도망쳤다. 잠에서 깨어난 화주성의 병사들이 점점 모였고 화주성 동문에서 전투에 패배한 한궤 등은 결국 서위에 항복했다. [[문제(서위)|서위 문제]]는 기습을 당했어도 적장을 사로잡은 왕비를 가상하게 여겼다. 서위와 동위가 전쟁중일 때 관중에 기근이 들었는데, 군량으로 쓰기 위해 관에서는 곡식들을 징수했고, 곡식을 숨기는 백성들은 처벌을 받아 원성을 샀다. 그러나 왕비는 사람들의 신뢰를 샀기에 적지 않은 곡식들을 거둘 수 있었고, 원망하는 백성들도 없었다. 537년 사원 전투에서도 왕비는 요충지인 화주성을 지켰다. 고환이 화주성 아래까지 이르렀는데, 왕비는 고환에게 >어째서 항복하지 않는가?[* 何不早降?] 라고 묻고는 크게 웃으며 >이 성은 내 집으로 죽고 사는 것은 이에 있으니, 죽고자 하는 자만 오라![* 此城是王羆家, 死生在此, 欲死者來!] 라고 외치니, 고환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 뒤에 하동으로 옮겨 주둔했다. 전후 부풍군공으로 진작됐고 조청작의 난 이후 옹주자사로 옮겼다. [[유연]]이 하남을 침략했을 때 조정에서 응전을 준비했다. 우복야 주혜달이 하동의 왕비를 부르는데, 왕비는 >만약 유연이 [[위수]] 북쪽에 이르면 제가 향리를 이끌고 그들을 격파해, 국가의 병사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성중의 천자가 이같이 경솔하게 움직인단 말입니까! 오직 주가의 어린아이(=주혜달)가 이와 같이 겁낼 뿐입니다.[* 若蠕蠕至渭北者, 王羆率鄉里自破之, 不煩國家兵(馬). 何爲天子城中, 遂作如此驚動!由周家小兒恇怯致此.] 라며 도리어 주혜달을 비판하고 소환을 거부했다. 얼마 뒤에 다시 하동으로 돌아갔다. 대통 7년(541) 진중에서 죽었으며, 태위 도독 상·기 등 10주자사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 가족 관계 == 왕비의 아들 왕경원(王慶遠)은 약관의 나이에 공신의 아들로서 직합장군에 임명되나 왕비보다 먼저 죽었다. 그 아들로 왕비의 손자인 왕술(王述)이 부풍군공을 습봉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41년 사망]][[분류:경조 왕씨]][[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