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나라의 후궁]][[분류:흉노]] [include(틀:중국 4대 미녀)] [[파일:external/cfs10.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YxNnVAZnMxMC5ibG9nLmRhdW0ubmV0Oi9JTUFHRS8yLzIwOC5qcGcudGh1bWI=&filename=208.jpg]] [목차] == 개요 == 王昭君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경의 인물로,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정확한 생몰연도는 불확실하다. 다만 호한야 선우와 결혼한 시기 등을 통해 출생 년도를 추정할 뿐이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왕장(동음이의어)|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또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영호 연지(寧胡 閼氏)'''로 봉했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에 등장하는 미녀들이 국가의 [[멸망]]에 관여하는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왕소군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소군이 자의로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정말 자신을 희생한 것인지는 불명. == 혼인 과정 == 한서 원제기에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경녕은 동흉노는 한나라에 순종해오고 서흉노는 멸망시켰음을 기념하는 연호이다.]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위와 같이 혼인을 요청하자,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嬙)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원제(전한)|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하지만 왕장만이 뇌물을 주지 않아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었다.[* 당연히 모연수가 뭔가 훼방을 놓은 것이지만 정확한 언급은 없다. 추녀로 그렸다는 설도 있고, 눈물점을 찍어서 과부상으로 그렸다는 설도 있다.] 당시 [[흉노]]와 [[전한]]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흉노의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는 한족 [[궁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는데, 이에 [[전한]]은 적당히 [[후궁]]을 보내기로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부마국이 되려고 [[공주]]를 보내 달라고 했으나, 공주가 너무 어린 나머지 춥고 험한 북쪽으로 공주를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던 원제가 호한야 선우한테 공주 대신 궁녀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양해를 구한 이야기도 있다.] 원제는 그래서 초상화만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왕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기 전날에 왕장을 만나보았더니 웬걸, 왕장이 천하절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왕장을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분노한 원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 유복한 노후 == 위에 나온 저런 사연 따위를 알 리 없는 [[호한야]] 선우는 '이런 [[미녀]]를 주다니 [[한나라]]가 우리 [[흉노]]와 잘 지내고 싶다는 거구나'하고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으며[* 당시 호한야 선우의 동흉노는 이미 한나라에 칭신한 상태였으며 서흉노가 한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중히 그녀를 대접했다. 왕장은 호한야 선우의 [[연지#s-2]]가 되어 아들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의 사후 당시 흉노족의 수계혼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누약제 선우[* 전우 연지와 호한야 사이에 난 아들로 이름은 조도막고이다.]의 처가 되어 딸을 낳았다.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기에 이를 왕장의 비극이라고 하기도 하나 유목민들의 사회에서는 자신을 낳은 생모나 적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아들이 들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습속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그 재산은 아내가 상속받게 되는데, 이 아내가 다른 사람과 재혼할 경우 가문의 재산이 재혼한 사람에게 전부 넘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 경우를 막기 위해서 자식이 아버지의 처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재산을 지켰다는 설이 있다.]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장이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의붓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자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전하며, 민간 전승에서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장은 사실 흉노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한족 문화를 흉노에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후한서]] 흉노 열전에 금조를 참고해서 쓴 범엽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은 모두 자기 아내로 들이지만, 친어머니와 적모는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왕장과는 상관이 좀 떨어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흉노와 한 왕조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흉노의 침략 또한 사그라들었다. 왕장을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인식할지언정 나쁘게 보지 않는 것엔 이런 점도 작용한 듯하다. == 가계 == * 호한야선우(계후산) * 아들, 우일축왕 이도지아사(右日逐王 伊屠智牙師) * 복주류약제선우(조도막고) * 딸, 수복거차(須卜居次)[* 거차는 흉노 말로 [[공주]]를 뜻하며, 수복과 당우는 흉노 귀족의 이름이다.] 운(云) * 딸, 당우거차(當于居次) == [[미녀]]와 [[비극]] 코드 == 이런 [[미녀]]와 [[비극]] 코드는 후대 창작자들의 감수성을 강하게 사로잡아, 다양한 작품에서 소재로 다루게 되었다. 왕장이 [[흉노]]에게 시집을 갈 때 고향 생각에 금을 켜자 기러기가 그 소리에 취해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과는 좀 다르다. 원래 이 말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온다. 제물론에서는 [[진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지고 달은 숨고 꽃도 고개를 숙이는 미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각각 [[서시|침어]], 낙안, [[초선|폐월]], [[양귀비|수화]]에 대응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4대 미녀가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댓구에 끼지 못한 [[조비연]]은 4대 미녀 취급을 받지 못한다.] 미인도에는 [[미녀]]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있는데, 왕장의 경우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호복이고, 보통 함께 사용된 것이 [[비파]]다. 그래서 만일 말 옆에서 모피옷 비슷한 것을 입고 비파 같은 현악기를 든 미인 그림을 봤다면 90%는 왕장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왜 100%가 아니냐면 [[채염]] 문희가 있기 때문이다. 이쪽도 사정이 비슷해서 이미지가 서로 섞인다.] 그 외에 흉노의 추운 날씨(고향에서 보던 꽃과 풀이 없으므로)를 비관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다. 이 시는 정확하게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昭君怨 漢道初全盛 한나라 비로소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 넘쳐나건만 何須薄命妾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고 辛苦遠和親 괴로워라 멀고도 먼 화친 길 掩涕辭丹鳳 눈물을 삼키며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은 채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놀라 그저 기뻐하지만 無復舊時容 예전의 낯빛을 다시 찾을 길은 없구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히 허리띠가 헐렁해지는데 非是爲腰身 이는 가는 허리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또한 죽은 뒤 [[흉노]] 땅에 묻혔는데, 그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부른다고 한다. 네이멍구 지역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유명한 시인 [[이태백]]과 [[백거이]]나 시와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왕안석]], [[석숭]]도 왕소군을 읊은 시를 남기는 등 미인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아래는 [[이태백]]이 남긴 시 2수이다[* 이백의 시는 조각조각으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첫 번째 시의 앞 4연이 위에 언급된 동방규의 소군원에 붙어 나온 것도 있다. 즉 오언율시 2수인지 오언절구 1수인지 헛갈린다. 아래 시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건 이것대로 헛갈리는 게, 애초에 오언율시니 칠언절구니 하는 정형시 구조가 두보 이후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래시는 1+2+3도 있고, 1 2+3도 있고, 1 2 3도 있다.] ||소군원昭君怨 昭君拂玉鞍 왕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이면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漢家秦地月 한나라 시절 옛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 한번 옥관도에 올라 天涯去不歸 멀리 떠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 달은 돌아와 다시 동해에 떠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돌아올 줄 모르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蛾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도다 生乏黃金枉畵工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대만]]의 개그 만화 "크레이지 스토리"에서 위에서 언급한 [[형사취수]] 관련 풍습을 재치 있게 패러디했다. 왕장이 [[흉노]] 땅에 시집가면서 흉노족 시녀들이 "우리 임금님은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추남"이라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고 실망하는데, 실제로 보니 '''준마를 타고 평원을 달리는 잘 생긴 청년왕'''이 흉노족의 선우였던 것. 한족과 흉노족의 미의 기준이 달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고. 그리고 잘 생긴 남편 → 죽고 나니 잘 생긴 아들 → 죽자 잘 생긴 동생 등으로 가면서 [[역하렘]]을 했다는 내용으로 형사취수 풍습도 대차게 비틀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본이 개그만화이니 실제로 믿으면 곤란하다. [[반삼국지]]의 마지막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출연한다. 위나라가 망한 후 왕장의 묘 부근에서 초막을 짓고 야생인간으로 살던 [[조식]]이 그곳에서 북방민족의 왕이 된 [[조창]]과 재회하는 것이 소설의 끝이다. == 대중매체에서 == [[파일:문명 온라인 왕소군 2.jpg]] [[문명 온라인]]에서 중국 문명의 [[보좌관]]으로 등장한다. 본명 '왕장'이 아니라 '왕소군'으로 나온다. 2007년 [[중국 드라마]] '왕소군'이 CCTV에서 방영되었다. [[양미]]가 왕장을 연기했다. 2015년 게임 [[왕자영요]]에서 법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얼음마법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