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34년 출생]][[분류:400년 사망]][[분류:동해 왕씨]] [include(틀:진서)] ||<-2> '''{{{+1 王雅[br]왕아}}}''' || || '''성''' ||왕(王) || || '''이름''' ||아(雅) || || '''자''' ||무달(茂達) || || '''본관'''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 || '''생몰''' ||334년 ~ 40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의 관료로 자는 무달(茂達). 서주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사람이다. == 생애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중신 [[왕랑]]의 현손으로, 왕아의 증조부는 유학자로 유명했던 [[왕숙]]이었다. 조부인 왕륭(王隆)은 후장군(後將軍)을 지냈다. 부친인 왕경(王景)은 대홍려(大鴻臚)를 지냈다. 왕아는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렸으며, 주에서 주부로 벽소되고 수재 급제로 낭중에 임명되었다. 또한 영흥현령으로 전출되어 노련한 일처리로 칭송을 받았다. 왕아는 뒤에 상서좌승까지 승진했으며, 정위(廷尉), 시중(侍中), 좌위장군(左衛將軍), 단양윤(丹陽尹)을 역임하고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을 겸임하였다. 효무제는 동생인 사마도자에게 나라를 다스릴 재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죽은 뒤에 황실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효무제는 당대에 명망이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중신으로 삼았는데, 이때 [[왕공(동진)|왕공]]과 [[은중감]]을 발탁하려고 왕아에게 의견을 구했다. 왕아는 왕공과 은중감에게 나라를 다스릴 재능이 없어서 대임을 맡을 수 없다고 여겨 효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왕공은 풍채가 오만하고 고귀하며, 모습이 방정하고 엄숙하며, 이미 외척이라는 귀중한 자리에 있고 친현(親賢)으로 의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준엄하지만 편협한 면이 있으며, 조금도 남을 포용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절조가 있으며, 절개를 지킬 뜻이 없습니다. 은중감은 비록 사소한 일에 신중하고 문사로 이름났지만 역시 큰 도량이 없고 또한 일을 처리할 재능과 모략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지방관이라는 중책을 맡겨서 지세가 유리한 곳에 근거한다면 지금은 사해가 무사하여 족히 직무에 충실할 수 있지만 만약 중간에 변고가 생긴다면 그들은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효무제는 왕공 등이 당대에 뛰어난 명망이 있다고 여겼지만 왕아가 그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질투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왕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효무제에게 발탁되었지만 그 뒤에 몰락했기에 당대의 사람들은 왕아가 다른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아본다고 칭송하였다. 왕아는 뒤에 영군(領軍), 상서(尙書),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겼다. 조정에서는 장차 왕아를 크게 중용하여 재상에 버금가는 지위에 앉히려고 했으나, 효무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고명조차 받지 못했다. 왕아는 효무제의 후한 대우를 받았지만 순식간에 권력을 잃어버렸고 또한 사마도자가 섭정을 맡으면서 동진의 정치가 혼란해졌기에 신중한 태도와 침묵을 지켰다. 398년,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400년, 상서우복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에 사망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 의동삼사(儀同三司)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