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2> '''{{{+1 王彦昇[br]왕언승}}}''' || || '''성씨''' ||왕(王) || || '''이름''' ||언승(彦昇) || || '''자''' ||광렬(光烈) || || '''생몰''' ||917년 ~ 974년 || || '''국적''' ||전촉(前蜀) → 후당(後唐) → 후진(後晉) [br]→ 후한(後漢) → 후주(後周) → 북송(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무관으로 자는 광렬(光烈). == 생애 == 본래는 [[전촉]] 출신의 인물로 917년에 태어났는데, 925년에 전촉이 [[후당]]에게 멸망하면서 후당의 수도인 낙양에 거처하게 된다. 왕언승은 처음에 환관인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맹한경(孟漢瓊)을 섬겼는데, 맹한경이 왕언승의 용맹함을 눈여겨보고 명종 [[이사원]]에게 이야기하여, 왕언승은 동반승지(東班承旨)로 보임되었다.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들어선 뒤 왕언승은 내전직(內殿直)이 되었다. 개운 연간 거란이 후진의 대명부를 포위하고 황제인 [[석중귀]]가 전주(澶州)로 대피하자, 왕언승은 나언괴와 함께 용맹한 군사들을 모집하여 거란의 포위를 뚫고 전주로 입성하여 호성지휘사(護聖指揮使)로 승진하였다. [[후주]]가 들어선 뒤, 왕언승은 상공(向拱)과 함께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의 침공을 물리쳤고 북한의 장수인 왕장(王璋)을 참수하여 용첩우제9군도우후(龍捷右第九軍都虞候)로 승진하였고, 거듭 철기우제2군도교(鐵騎右第二軍都校) 겸 합주(合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시영]]이 [[남당]]을 정벌할 때, 왕언승은 남당 정벌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산원도지휘사(散員都指揮使)로 전임되었다.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나고 후주의 장군이었던 조광윤이 군중의 추대를 받자, [[한통]]은 황급히 군대를 인솔하고 조광윤을 막으려고 했지만 도중에 왕언승과 마주친다. 왕언승은 한통을 추격하여 그를 독단적으로 살해하였다. 조광윤은 진교의 변이 일어난 뒤 추호도 잘못을 범해선 안 된다고 맹세하였지만, 왕언승이 독단적으로 한통을 살해하자, 왕언승에게 죄를 주려고 했지만 결국 죄를 주지 않는 대신 평생 절도사 지위를 주지 않았다. 조광윤이 [[시종훈]]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북송]]을 건국한 이후 왕언승은 은주(恩州) 단련사 겸 철기좌상도지휘사(鐵騎左廂都指揮使)로 임명되었다. 뒤에 왕언승은 수도의 순검이 되었는데, 어느 날 [[왕부(북송)|왕부]]의 저택에 이르렀다. 왕부는 매우 놀랐지만 곧이어 앉았고, 왕언승은 왕부에게 오늘 저녁의 순찰이 지쳤으니 공과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왕언승은 왕부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왕부는 이를 모르는 척을 하고 술을 두고 왕언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에 왕부는 왕언승의 일을 아뢰었고 왕언승은 결국 당주(唐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왕언승은 신주(申州) 단련사를 맡았다가, 969년에 방주(防州) 방어사로 옮겼고 같은 해 겨울에 다시 원주(原州)에 진수하였다. 왕언승은 974년에 병에 걸렸고 결국 사망하였다. == 여담 == * 왕언승은 격검을 잘 해서 왕검아(王劍兒)라고 불렸다. * 왕언승은 힘이 강했던 한편 성품이 잔인하였다. 왕언승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군법을 어기자 왕언승은 군법을 어긴 이는 물론 부하 관리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왕언승은 군법을 어긴 이의 귀를 손으로 뽑아 큰 소리로 귀를 씹어먹었고 술과 안주를 두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17년 출생]][[분류:97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