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장사목후(長社穆侯)[br]{{{+2 王慧龍 | 왕혜룡}}}''' || || '''시호''' ||목(穆) || || '''작위''' ||장사후(長社侯) || || '''성''' ||왕(王) || || '''휘''' ||혜룡(慧龍) || || '''자''' ||불명 || || '''생몰''' ||[[391년]] ~ [[440년]] || || '''국적''' ||[[동진]] →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 → [[북위]] || || '''출신'''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晋陽縣) || || '''부친''' ||왕집(王緝)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명장. 동진의 상서좌복야 [[왕유(동진)|왕유]]의 손자이자, 산기상시 왕집(王緝)의 아들. == 생애 ==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할아버지 왕유가 여러 손자들 중 제일 뛰어난 것이 용과 같다며 "혜룡(慧龍)"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원흥 3년(404년) 3월, [[송무제|유유]]에게 항복했던 왕유는 불안하여 아들 [[왕수(동진)|왕수]]와 함께 유유를 습격할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이내 멸족당했다. 이때 14세이던 왕집의 아들 왕혜룡만이 사문(沙門) 승려 빈(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렇게 100여 일 동안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지내던 왕혜룡은 승려 빈과 더불어 북위로 가기 위해 장강(長江)을 건너려 하였는데, 나루를 지키던 관리가 왕혜룡을 보고 왕씨의 자제가 아니냐 의심하자 승려 빈이 자신의 제자라고 둘러대어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서쪽으로 올라가 강릉(江陵)에 이르러서 숙조부 형주(荊州)자사 [[왕침(동진)|왕침]]의 옛 관리인 전(前) 형주치중 습벽강(習闢疆)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의희 원년(405년) 10월, 형주자사 위영지가 사망하여 잠시 빈틈이 생기자, 강릉현령 나수(羅脩)가 습벽강, 유기공(劉期公), 왕등(王騰) 등과 왕혜룡을 주군으로 받들어 강릉에서 거병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병주자사 [[유도규]]가 형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하니, 나수는 거병을 하지 못하고 승려 빈과 함께 왕혜룡을 받들어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양양(襄陽)에 이르렀을 때, 사마덕종이 임명한 옹조(雍州)자사 [[노종지]]의 도움 덕에 무사히 강을 건너고 호뢰(虎牢)로 들어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 망명하였다. 태상 2년(417년) 9월, 후진이 패망하자 왕혜룡은 다시 도망길에 올라 [[북위]]로 망명하였다. [[명원제]] 탁발사가 왕혜룡을 불러 그와 친히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왕혜룡은 황제 앞에서 남정하여 유유를 징벌해달라 호소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명원제는 왕혜룡의 모습에 감동하여 도움을 주겠다고는 하였지만, 훗날 남벌을 실시하여 [[송(남조)|송나라]]와 격전을 벌일 때 왕혜룡을 중용하지는 않았다. 태상 8년(423년) 11월, 명원제가 왕혜룡을 낙성진장(洛城鎮將)으로 임명하고, 군사 3,000명을 주어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진수케 하였다. 그리고 10여 일이 지났을 무렵에 명원제가 붕어하고 [[태무제]] 탁발도가 즉위하였다. 태무제는 남방 출신의 [[한족]]에게 군사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해 명원제의 임명을 취소하고 군권을 회수하였다. [[최호(북위)|최호]]의 동생인 최념(崔恬)은 왕혜룡이 진나라의 명문가인 태원 왕씨의 자제라는 것을 듣고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태원 왕씨 집안은 대대로 코가 붉게 물드는 비사증이 있기로 유명했고, 강동에서도 태원 왕씨 가문을 가리켜 "사왕(皻王)"이라 불렀기에, 왕혜룡의 얼굴을 본 최호가 말했다. > "왕가 자제라더니 과연 믿을만하구나." 또, 왕혜룡의 코가 큰 것을 보고 최호는 > "진실로 귀한 혈통을 타고 났도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를 듣고 기분인 언짢아진 사도 [[장손숭]]은 태무제를 알현해, 최호가 남방인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헐뜯는 것이다라며 참소하였다. 태무제 역시 노하여 최호를 문책하니, 최호는 면직당하고 황제 앞에서 사죄한 후에야 겨우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북위로 귀순한 노종지의 아들 [[노궤]]가 왕혜룡은 승려 빈이 왕유의 집에서 사통하여 낳은 아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왕혜룡은 한동안 태무제에게 홀대받아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하다가, 낙안왕 탁발범(拓跋範)의 부(傅)에 제수받고 영 병형양3주대중정(領並荊揚三州大中正)을 겸하였다. 하지만 왕혜룡은 상표하여 남쪽으로 부임하고 싶다 청하였고, 최호의 도움을 받아 남만교위, 안남대장군 [[사마초지]]의 좌장사로 고쳐 임명되었다. 시광 3년(426년) 2월, 송의 형주자사 [[사회(유송)|사회]]가 강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 [[유의륭]]은 장수 [[도언지]], [[단도제]]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사회를 토벌케 하였다. 왕혜룡은 사회를 원조하기 위해 사마 노수(盧壽) 등과 10,000명의 병력을 발동해, 나아가 사릉수(思陵戍)를 뽑고 항성(項城)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한 달도 안 지나서 사회가 패망하니, 왕혜룡은 군대를 거두어 물러났다. 신가 3년(430년) 3월, 송의 영삭장군 왕현모(王玄謨)가 활대(滑臺)를 침공해왔다. 왕혜룡은 초병장군에 임명되어 안힐(安頡) 등과 공동으로 송군을 물리칠 작전을 짰다. 그때 왕현모가 50여 일 동안의 대치를 깨고 먼저 북위군을 공격하자, 왕혜룡은 기병(奇兵)을 갖추어 왕현모를 대파하였다. 이에 태무제는 왕혜룡을 용양장군으로 삼고 장사후(長社侯)로 봉한 뒤, 검, 말, 돈, 비단 등의 하사품을 내렸다. 이후 왕혜룡은 형양(滎陽)태수로 옮겨져 10년 동안 지역을 다스리면서 농업과 군대를 나란히 정비하여 치적을 쌓았다. 왕혜룡의 선정에 대한 소문은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백성 10,000여 호가 귀부해왔다. 신가 4년(431년) 2월, 관군장군 안힐과 안남대장군 사마초지가 송의 장수 주수지(朱脩之)가 지키고 있는 활대를 쳤다. 이때 왕혜룡도 태무제의 명을 받들어 활대를 쳐 함락시켰고, 주수지와 동군(東郡)태수 신모(申謨)를 사로잡았다. 활대를 구원하기 위해 역성(歷城)까지 나아갔던 단도제는 북위의 수광후 숙손건(叔孫建)의 기습으로 군량이 불타 없어져 귀환했다. 이후로도 송의 문제 유의륭은 단도제와 도언지 등을 여러 차례 보내 자주 남쪽 변경을 자주 침노했지만, 번번이 왕혜룡에게 막혀 예봉이 꺾이고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한번은 도언지가 친구 소빈(蕭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 노궤는 굳세지만 우둔하고, 사마초지는 호쾌하지만 꺼리낌이 없어 걱정거리도 되지 않으나, 북으로 망명한 자들 중 오직 왕혜룡과 [[한연지]]만은 심히 두렵다네. 라는 글을 적기도 하였다. 문제 유의륭은 장차 왕혜룡을 제거하고자 [[반간계]]를 써서, 북위에 "왕혜룡이 사마초지를 붙잡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으나, 태무제는 넘어가지 않고 옥새를 찍은 조서를 보내 > 유의륭이 장군을 호랑이 보듯 두려워하여, 장군을 중상모략한다는 사실을 짐은 스스로 잘 헤어리고 있다. 풍진지언(風塵之言) 따위에 개의치 말도록 하라. 라며 왕혜룡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반간계가 통하지 않자 유의륭은 자객 여현백(呂玄伯)을 고용해 왕혜룡의 수급에 200호의 남작과 1,000필의 비단을 현상금으로 걸었다. 여현백이 왕혜룡을 찾아가 거짓 투항하고, 왕혜룡에게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며 독대를 청하니, 왕혜룡은 이를 의심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명해 여현백의 몸을 수색케 하였다. 과연 왕혜룡의 예상대로 여현백의 품 안에서 1척 길이의 칼이 나왔다. 여현백은 자포자기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죽음을 청했으나, 왕혜룡이 말했다. > "자객은 그 주인을 위해 일하는 법이다. 나는 차마 이 자를 해칠 수 없구나." 그리고는 좌우에 명하여 여현백을 풀어주고 죽이지 말라 당부하였다. 사람들이 다시 오면 어떡하냐 걱정하자 왕혜룡은 > "어차피 생사는 하늘에 달렸으니 다시 와서 나를 해친다한들 어찌할 수 있겠느냐?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인의(仁義)를 방패로 삼았거늘, 어찌 또 자객이 올 것을 걱정하느냐?" 라 말하고 집으로 갔다. 사람들은 그의 넒은 아량에 깊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왕혜룡은 어렸을 적부터 환난을 겪은 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항상 우울증에 시달렸고, 〈제오자서문(祭伍子胥文)〉이라는 시를 지어 그 기분을 표현했다. 부인 최씨가 1남 1녀를 출산한 이후부터는 부부의 밤일도 하지 않았고, 베옷을 입고 채식을 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길한 일이 있어도 과하게 기뻐하지 않았고, 모든 행동거지에 예의가 있어 태자소부 유아(游雅)가 칭송했을 정도였다. 또, 왕혜룡은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어 제왕의 제도에 관한 책 18편을 편찬해, 이를 엮어 《국전(國典)》이라 하였다. 태평진군 원년(440년), 사지절, 영남장군, 호뢰진도부장(虎牢鎮都副將)에 임명되었고, 그 해 말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공조 정엽(鄭曄)에게 > "나는 객지에 머무는 남방인이라 조정의 옛 은혜는 없었으나, 조정에서 자애로이 받아주어 나는 목숨을 바쳐 전쟁터를 누빌 수 있었다. 본래 오(吳)의 시장에서 원수의 무덤을 파내고 그 시체를 채찍질함으로써 가문의 원한을 풀고자 하늘에 맹세하였는데, 병이 위중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오직 국가의 신령을 우러러 볼 수 없으니, 실로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내가 이리 단명하는 것에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내가 죽고나면 나를 하내(河內)의 동향(東鄉)에 묻어, 옛 묘지의 형식대로 봉분을 세우지 말고 내 머리만 족히 덮을 정도로만 묻어다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 너에게 [[결초보은]]하겠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북위의 법에 따르면 남조에서 귀부한 이들의 시신은 모두 상건(桑乾)에 매장하게 하였기에, 정엽 등은 조정에 상표하여 양해를 구했고, 조정에서도 이를 허하였다. 조정에서는 왕혜룡을 안남장군, 형주자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목후(穆侯)'라 하였다. 아들 왕보흥(王寶興)이 후사를 이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왕혜룡의 묘소 곁에 절을 세우고, 왕혜룡과 승려 빈의 초상화를 놓았다. 과거 왕혜룡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던 자객 여현백은 그 곁에 기거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왕혜룡의 묘지를 지켰다고 한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391년 출생]][[분류:440년 사망]][[분류:태원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