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용동궁'''}}}}}}'''[br]'''{{{#ffd700 '''龍洞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용동궁 터,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동부 연화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길 58 ~ 68) }}} || ||<-2> '''설립시기''' || 미상 || ||<-2> '''해체시기''' || 1907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0 22-02-42.jpg|width=100%]]}}} || || {{{#gold '''현재 용동궁 터 자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동 독일영사관.png|width=100%]]}}} || || {{{#gold '''뭘렌도르프의 저택으로 사용할 당시의 모습'''}}}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왕실의 별궁. [[조선]] [[명종(조선)|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가 살았던 곳이다. == 역사 == [[순회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하여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너무 어리고 더운 날씨 탓에 [[궁]]에 머물렀다. 하지만 자라면서도 건강하지 못하여 결국 5세에 [[궁궐]] 밖에서 잠시 거처했다. 이 것을 용동궁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1556년(명종 11년)에는 다시 [[중종(조선)|중종]]의 잠저였던 [[어의궁|상어의궁]]에 가 있었다. [[순회세자]]는 11살에 윤옥의 딸 [[공회빈 윤씨|덕빈 윤씨]]와 [[결혼]]했는데, 2년 후에 후사도 없이 13세의 [[요절|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죽음으로 덕빈 윤씨는 궁을 나와 이 곳에 머물렀다. 이후 용동궁은 덕빈 윤씨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고 [[궁]]에 딸린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로 경제 생활을 관리해주는 곳이 되었다. 그 뒤로도 사유 재산으로 내려오다가 훗날엔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와 [[효명세자]]빈 [[신정왕후 조씨]]의 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용동궁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궁이었는데, [[영조]]는 [[수진궁]], [[명례궁]], [[용동궁]], [[어의궁]], [[창의궁]] 등 5개 궁의 면세전을 1,000결(結)을 한정하여 표준으로 삼되, 명례궁과 용동궁 두 궁은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관할하므로 특별히 500결을 더 주도록 하고, 그 밖의 궁방은 800결로 제한했다. [[조선]] 후기에 [[한성부]] 중부 수진방 박동으로 이전하여 ‘박동궁(礴洞宮)’으로도 불렸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친척 [[민겸호]]가 살았는데, 민겸호는 부정부패를 일삼아 1882년(고종 19년) 6월 [[임오군란]] 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집에 입주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고종은 이 집을 정치 고문으로 초빙한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에게 하사했다. 묄렌도르프는 박동궁 [[한옥]]을 부분적으로 [[양식]]으로 개조해서 살았으며, 이 때 [[한국 건축]] 역사상 처음으로 [[유리]]창을 사용하였다. 1885년(고종 22년) 12월에 묄렌도르프가 [[중국]]으로 간 뒤 [[독일]] [[상인]] 에두아르트 마이어가 설립한 세창양행에서 이곳을 관리했고, 1886년(고종 23년) 11월부터 1889년(고종 26년)까지 [[주한독일공사관|독일공사관]]이 있었다. 이후 독일공사관은 정동 육영공원이 있던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로 [[이사]]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용흥궁 명신여학교 사감.jpg|width=100%]]}}} || || {{{#gold '''명신여학교 학감 주택'''}}} || 1905년([[광무]] 9년) 이후로 용동궁은 빈 궁이었다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소유가 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용동궁에 [[명신여학교]]를 설립했는데, 명신여학교는 곧 [[숙명여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순헌황귀비와 그녀의 친정 [[영월 엄씨|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숙명여학교]] 외에 [[진명여학교]]와 [[양정학교]](남학교)도 설립했다. 학제가 바뀜에 따라 [[숙명여학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고등여학교 등으로 불리다가, 1951년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숙명여자중학교]]와 3년제 [[숙명여자고등학교]]가 되었다. 1938년에는 [[전문학교]] 과정도 신설되었고, [[숙명여자전문학교]]는 1948년 숙명여자대학으로,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숙명여중고가 1980년 [[강남구]] [[도곡동]]으로 옮긴 이후, 현재 용동궁 자리에는 대한재보험공사의 코리안리재보험빌딩과 대한석탄협회의 석탄회관빌딩이 들어서 있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