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include(틀:한국의 정원)]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5호 ||<|2> ← || '''6호''' ||<|2> → || 7호 || || [[정업원|정업원 터]] || '''용양봉저정''' || [[성제묘]]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 ||<-2> {{{#fff {{{+1 '''용양봉저정'''}}}[br]{{{-1 龍驤鳳䎝亭}}}}}}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용양봉저정,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32길 14-7[br](본동 10 - 30)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 || '''{{{#fff 수량 / 면적}}}''' || 건물 1棟, 토지 162.6㎡ || || '''{{{#fff 지정연도}}}''' || [[1972년]] [[5월 25일]] || || '''{{{#fff 시대}}}''' || [[1787년]]([[정조(조선)|정조]] 13년) ~ [[1789년]](정조 15년)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서울특별시]] [[동작구청]]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용양봉저정.jpg|width=100%]]}}} || || {{{#ffd700 '''용양봉저정[* [[https://www.seouland.com/arti/culture/culture_general/3582.html|사진 출처 - 《서울&》: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 정조의 사도세자 참배길 배다리 놓는 관아 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OKnRH9ZhWo)]}}} || || {{{#ffd700 ''' 서울 현대 HCN에서 제작한 〈[우리 동네 속으로] '임금님의 효성' 용양봉저정〉 영상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의 [[행궁]].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32길(본동) [[한강]]변에 있었다. == 이름 == 여기서 보이는 [[한강]] 이북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며(驤) 솟아오르고 [[봉황]](鳳)이 날아오르는 것(䎝) 같다'하여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이란 이름이 붙었다. == 용도 및 역사 == 조선 22대 임금 [[정조(조선)|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건릉|현륭원]]에 참배하러 오갈 때 잠시 쉬어가기 위해 지었다. 궁궐이 있는 [[한성부|한양]]에서 현륭원이 있는 [[수원화성|수원]]으로 오가는 길목에는 [[한강]]이 있다. 정조 본인과 수행원 한두명 정도만 대동했으면 상관없겠지만 참배길에는 수많은 인원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같이 따라와서 행렬을 이뤘다. 이들이 수월하게 강을 건너려면 [[주교(동음이의어)#s-4|배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 배다리를 설치할 시간에 기다릴 일종의 대기실 겸 휴게실로 건립한 곳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이때 쉬면서 점심 식사를 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로도 불렸다. 다만, 단순한 휴식처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갈 때는 쉬면서 행렬을 재정비하는 공간으로 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행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포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용양봉저정 앞 넓은 모래밭에서 시위 군병들의 군사 훈련 및 무예 시험을 열기도 했다. 용양봉저정의 위치는 [[노들나루]] 바로 앞이다. [[조선시대]]에 노들나루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한성부|한양]] 이남의 모든 [[조운(동음이의어)#s-2|조운]]은 몽땅 여기로 와서 취합한 후 한강을 건넜으며,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 배를 탈 때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탔다. [[정조(조선)|정조]]가 이곳을 원행길로 정한 것은 이곳이 [[수원화성|수원]]으로 가는 빠른 길목이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효성]]과 [[위엄]]을 드러내려고 한 목적도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주교사.jpg|width=100%]]}}} || || {{{#ffd700 '''주교사 터 비석. 용양봉저정 서쪽, 한강대교 남단 인도에 있다. '''}}} ||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나 용양봉저정 안내판에 따르면, [[정조(조선)|정조]]가 [[융건릉|현륭원]]을 [[수원시|수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원행을 시작한 1789년(정조 15년)에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791년(정조 1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근처에 아예 배다리를 놓고 조운을 돕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세워졌다. [[정조(조선)|정조]] 시기 후에도 임금들이 [[한강]] 이남을 오갈 때, 이곳에 잠시 들러 머물거나 수행원들에 대한 포상 행사 등 [[행궁]]처럼 사용하면서 '노량행궁(鷺梁行宮)'으로도 불렸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A%A9%EC%96%91%EB%B4%89%EC%A0%80%EC%A0%95(%E9%BE%8D%E9%A9%A4%E9%B3%B3%E7%BF%A5%E4%BA%AD)|#]]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왕실에서 사용했다가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유길준]]에게 하사했다. 유길준은 황제의 은덕에 감격하여 이곳에 머물지 않고 이름을 '조호정(詔湖亭)'으로 바꾸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A%A9%EC%96%91%EB%B4%89%EC%A0%80%EC%A0%95(%E9%BE%8D%E9%A9%A4%E9%B3%B3%E7%BF%A5%E4%BA%AD)|#]]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에는 [[일본인]] 이케다(池田)가 소유하면서 이름을 '용봉정(龍鳳亭)'으로 바꾸었고, 일부 전각을 헌 뒤 용양봉저정 터를 포함한 대지 5,300여 평에 운동장, 식당, 목욕탕 등 오락 시설들을 두었다. [[8.15 광복|광복]] 이후에는 다시 정부에서 소유하면서 이케다가 만든 시설들을 철거했다.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받았다. == 건물 == * 조선시대에는 정문과 누정 등 건물 2, 3채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정자 하나만 남아있다. == 여담 == * [[선조(조선)|선조]] 시기에는 이 자리에 [[우의정]] 이양원의 [[별장|별서]]가 있었다. *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지정 이후 보호 결연을 맺은 중앙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청소해왔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2111000209206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11-10&officeId=00020&pageNo=6&printNo=15726&publishType=00020|#]] * [[사육신공원]]이 근처에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6U9XZ2N5PY)]}}} || || {{{#ffd700 ''' 퓨전국악비단에서 제작한 〈사도가〉 뮤직비디오 영상 '''}}} || 2021년 11월 30일에 퓨전국악비단에서 용양봉저정에서 촬영한〈사도가〉 뮤직비디오 영상을 공개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노들나루, version=36)]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