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양락정혜남(襄樂貞惠南)[br]{{{+1 宇文福 | 우문복}}}''' || || '''시호''' ||정혜(貞惠) || || '''작위''' ||신창현후(新昌縣侯) → 창려현백(昌黎縣伯)[br]→ 양락현개국남(襄樂縣開國男) || || '''성''' ||우문(宇文) || || '''이름''' ||복(福) || || '''생몰''' ||? ~ 489년 || || '''조부''' ||우문활발(宇文活撥) || || '''본관''' ||하남군(河南郡)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관료. == 생애 == 우문복의 조상은 남선우의 먼 친척으로 우문복은 우문활발(宇文活撥)의 손자였다. 우문복은 福少驍果,有膂力。 태화(太和) 연간, 우림낭장(羽林郞將)에 임명되고 건절장군(建節將軍)에 전임되었으며, 신창현후(新昌縣侯)에 봉해지고 남정도장(南征都將)에 임명되었다. [[제(남조)|남제]]의 침공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워서 현무장군(顯武將軍)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회무장군(恢武將軍), 북정도장(北征都將)에 임명되었고 군복을 하사받았다. 우문복은 [[유연 제국]]의 별부를 정벌하여 1만여 명을 사로잡았고 돌아와서 도목급사(都牧給事)에 임명되었다. 493년, [[효문제]]의 남정에 종군하여 임시로 관군장군(冠軍將軍), 후군장군(後軍將軍)에 임명되었다. 494년, 효문제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뒤 우문복은 효문제의 명을 받아 말을 방목할 장소를 조사하였다. 우문복은 석제(石濟)로부터 서쪽, 하내(河內)로부터 동쪽, 황하의 남북 2,000리를 방목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후 여러 가축들을 방목지로 옮겨왔는데, 우문복이 가축들을 잘 길렀고 단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효문제가 이를 칭찬했고 사위감(司衛監)으로 삼았다. 우문복은 효문제가 예주(豫州)로 순시를 떠날 때 효문제를 따라서 관군장군(冠軍將軍), 서도도장(西道都將), 가절(假節), 정로장군(征虜將軍)에 더해졌고 정예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효문제의 뒤를 호위했다. 머지않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전임되고 태복(太僕), 전목령(典牧令)을 겸임하였다. 효문제가 남양(南陽)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무위장군(武衛將軍)을 겸임하였다. 498년, 우문복은 효문제의 남정에 종군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 양파(楊播)와 함께 선봉이 되었다. 등성(鄧城)에 도착한 우문복은 병사들과 장수들을 엄선해서 등성을 포위할 준비를 갖췄으며, 효문제는 우문복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한편 [[명제(남제)|명제 소란]]이 상서(尙書) 최혜경과 황문랑(黃門郞) [[무제(양)|소연]]에게 10만의 군사를 주고 등성의 구원군으로 보내자, 우문복은 500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남쪽을 찔러서 교량을 빼앗고 남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우문복은 말에 올라 맹세를 한 뒤 앞장서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우문복은 창려현백(昌黎縣伯)에 봉해졌고 정식으로 무위장군이 되었으며,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졌다. 이윽고 고차가 배반하자, 우문복은 정북장군(征北將軍), 북정도장이 더해져서 고차를 토벌하고자 출병했으나 패전하여 좌천되었다. 499년, 효무제가 붕어하고 [[선무제]]가 즉위하였다. 500년, 우문복은 평원장군(平遠將軍), 남정통군(南征統軍)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팽성왕(彭城王) [[원협]]에게 다음의 계책을 바쳤다. >건안(建安)은 회남(淮南)의 중진이자 적과 아군의 요충지입니다. 건안을 얻으면 의양(義陽)을 쉽게 도모할 수 있지만, 건안을 얻지 못하면 수춘(壽春)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원협은 우문복의 진언을 받아들였고 원협이 자사로 전출된 뒤 우문복에게 건안 침공을 명했다. 건안이 함락된 뒤 양락현개국남(襄樂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식읍 200호를 받았으며, 태복소경(太僕少卿)에 제수되었다. 502년, 소연이 남제의 마지막 황제인 [[화제(남제)|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양(남조)|양나라]]를 건국하였다. 양나라에서 북위의 변경을 침공하자, 우문복은 가절, 정로장군으로 임명되어 삼관(三關)에서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뒤에 우문복은 행예주사(行豫州事)로 임명되었고 동예주자사(東豫州刺史) 전익종(田益宗)과 함께 양나라에 대치하였다. 돌아와서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고 태복경(太僕卿)으로 전임되었다. 506년, 우문복은 양나라의 사주(司州)로 침공하여 1천여 명을 사로잡고 돌아갔다. 연창(延昌) 연간에 좌위장군(左衛將軍)을 겸임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도관상서(都官尙書)가 더해졌으며, 안동장군(安東將軍), 영주대중정(營州大中正)이 더해졌다. 516년, 진북장군(鎭北將軍), 영주자사(瀛州刺史)로 제수되었다. 517년, 대승적(大乘賊)이라는 종교 집단이 영주를 침공하자, 우문복의 아들인 우문연이 노복들을 이끌고 대승적에 대항하였다. 대승적이 우문복이 있는 서재에 불을 놓자, 우문연이 죽음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우문복을 부축하여 서재를 빠져나왔다. 우문연은 몸에 화상을 입고 머리카락이 타버렸지만 부하들을 이끌고 악전고투하여 대승적을 물리쳐서 칭송을 받았다. 우문복은 충성스럽고 청렴하 준엄하고 강직했으며, 신의로 백성들을 다스려 명성을 얻었다. 영주자사에서 물러난 뒤 다시 태복경으로 제수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회삭옥야무천3진제군사(都督懷朔沃野武川三鎭諸軍事), 정북장군(征北將軍), 회삭진장(懷朔鎭將)으로 전출되었으며, 우문복은 회삭진에 도착한 뒤 병으로 죽었다. 북위 조정에서는 우문복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정주자사(定州刺史)로 추증하고 개국남의 작위를 그대로 내렸으며,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