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위(춘추시대) 군주)] |||||| '''{{{#ece5b6 위(衛)나라 초대 국군[br]{{{+1 강숙}}}[br] 康叔}}}''' |||||||||| |||| '''[[성씨|{{{#ece5b6 성}}}]]''' ||희(姬) || |||| '''[[본관|{{{#ece5b6 씨}}}]]''' ||위(衛) || |||| '''[[휘|{{{#ece5b6 휘}}}]]''' ||봉(封) || |||| '''{{{#ece5b6 아버지}}}'''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목차] [clearfix] == 소개 == [[중국]] [[주나라|서주]] 시대 제후국 [[위(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의 초대 [[군주]]. [[주문왕]]의 삼남. [[무왕(주)]]의 친동생. 그는 삼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위(衛)나라의 [[백작]]이 되어 위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훗날 그 자손인 [[위무공]]이 강숙의 정치를 해서 나라를 강하게 했다는 말이 있다.] [[위강백]]의 아버지. == 생애 == === 초기 === 그는 주 문왕과 태사 사이에서 난 9번째 아들이다. 주 문왕이 죽고 백읍고 또한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주 무왕이 뒤를 이었다. 주 무왕 원년(기원전 1046년), 주 무왕이 목야전투에서 상나라를 이겨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워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정권 안정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신하들과[* 대표적인 사례가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의 시조인 [[강태공]]이다.] 종실 선현의 후손들을 분봉했다. 그리고 강숙을 강(康) 땅에 봉해 봉지를 내렸다. 그리하여 강숙이라 불리는 것이다. 당시에 주 무왕이 [[채숙도]], 곽숙 처, 관숙 선을 삼감에 봉해 주왕의 아들인 무경을 감시하게 했다. === 삼감의 난을 진압하다 === 주 무왕이 죽고 [[성왕(주)]]가 즉위했는데, 주 성왕은 나이가 어려 정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으므로 [[주공단]](周公旦)이 섭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감이 이에 반발해 주공 단을 모함하고 끝내는 이들이 무경과 짜고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을 삼감의 난이라고 한다. 이것이 주 성왕 2년의 일이었다. 주 성왕 4년, 주 성왕의 명령으로 삼감의 난을 주공 단이 진압할 때[* 그러나 주 성왕이 어리므로 사실상 주공 단의 뜻이라고 봐야 한다.] 강숙 봉이 거기에 참여했다. 그 결과 무경과 관숙 선은 처형당하고, 채숙 도는 유배되었으며, 곽숙 처는 서민으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주공 단은 주 성왕을 대신해 강숙 봉을 위(衛)나라에 봉했다. 그 땅은 상나라 수도 조가 일대였다. 그리고 그에게 상나라 유민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겼고, 영역은 대력 삼국지의 연주, 기주, 예주의 일부 정도로 제법 크게 봉해졌다. === 위나라에 분봉받은 뒤 === 주 성왕 7년, 주 성왕이 성인이 되자 주공 단은 섭정이 아닌 신하로서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주 성왕은 위 강숙을 사구로 임명해 법을 집행하니 범죄율이 줄어들고, 선한 행실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주나라 정치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위나라 국내에서는 백성들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가 죽고 그 뒤를 아들인 공자 무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 강백이다.[* 위 숙봉이 강 땅에 봉해져서 강백이고, 위 강백은 시호가 강이라서 강백이라 불리는 것이니 헷갈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사기)] [각주] [[분류:위(衞)나라의 군주]][[분류:창업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