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슈트로프 장군.jpg|width=100%]]}}}|||| ||<#666> {{{#FFF 이름}}} ||<(>'''Jürgen Stroop'''[br] 위르겐 슈트로프|| ||<#666> {{{#FFF 출생}}} ||<(>[[1895년]] [[9월 26일]][br][[독일제국]] [[리페 후국]] 데트몰트 || ||<#666> {{{#FFF 사망}}} ||<(>[[1952년]] [[3월 6일]] (56세)[br][[폴란드 인민 공화국]] [[바르샤바]] || ||<#666> {{{#FFF 복무}}} ||<(>[[독일 제국군]] [br] [[슈츠슈타펠]] (1932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br] [[질서경찰]] [[중장]]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br] [[바르샤바 게토 봉기]] || [목차] [clearfix] == 개요 ==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친위대]] 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이자 경찰상급지도자이다. [[바르샤바]]에서 봉기 진압을 하면서 [[학살]]을 저질렀다. == 초기 행적 == [[독일제국]] 데트몰트에서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슈트로프는 가톨릭 중산계층의 집안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등기소의 견습사원으로 일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 [[1914년]] [[8월]]에 프로이센군 제55 보병연대에 지원하여 종군한 그는 제256 보병연대에 편입되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로 보내져 종군해 종전시 2등 중사 계급 및 2급 철십자 훈장, 전상훈장을 받았다. == [[나치당]] 입당 == || [[파일:슈트로프 소령.jpg|width=100%]] || || [[슈츠슈타펠|SS]][[소령]] 슈트로프 || 1차 대전 후 [[1933년]]까지 고향에서 다시 등기소 직원으로 일한 슈트루프는 아내가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고, 자신도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흠모했기 때문에 [[나치즘]]에 공감했다. [[1932년]] [[7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슈트로프는 다시 [[슈츠슈타펠|친위대]]에도 가입했다. [[1932년]] [[11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원의 승리에 공헌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든 슈트로프는 제72 친위대연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1935년]] [[6월]]까지 제17 친위대지구 참모, [[1938년]] [[11월]]까지 제28친위대 연대의 지도자로 근무한 슈트루프는 친위대의 간부교육을 받아 고급 지도자로 소양을 쌓았다. == [[제2차 세계 대전]] == === 대전 초기 === [[1940년]] [[3월]]까지 제38친위대 지구 지도자로 일한 슈트루프는 [[폴란드 침공]] 때인 [[1939년]] [[10월]]에 [[포젠]]의 보조경찰로도 일했다. [[1940년]] [[3월]]부터 [[1942년]] [[11월]]까지 제42 친위대 지구의 지도자로 일한 슈트로프는 그 사이인 [[1941년]] [[7월]]부터 [[9월]]까지 제3 SS 장갑사단 해골부대에 입대해 중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제 1 SS장갑사단에서 대대장으로 한달 간 일한 슈트로프는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러시아]] 남부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였던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대장 아래에서 보안경찰 및 감찰관으로 일하며 남러시아의 치안유지에 종사했다. ===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 === || [[파일:바르샤바 슈트로프1.jpg|width=100%]] || [[1943년]] [[4월 19일]]에 [[바르샤바]]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였던 [[페르디난트 폰 잠메른 프랑케네크]] 친위대 상급대령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해임되자 힘러는 슈트로프를 그 자리에 앉혀 진압부대의 지휘를 맡겼다. 슈트로프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 [[바르샤바]]를 불바다로 만들고 봉기한 [[유대인]]들을 지하호로 몰아놓었다. [[5월 8일]]에 봉기의 중심조직이던 '''유대인 전투조직'''의 사령부를 발견하여 지휘관이었던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를 살해하는데 성공한 슈트로프는 [[5월 16일]]에 정식으로 봉기 진압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는 그 기념으로 유대교 교회당을 부셔버렸다. 슈트로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56,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했고, 작전 중에 7,000명을 사살했으며 이송 중에 6,929명을 처형하여 총 13,929명을 죽였다고 한다. 간접적인 화재와 유탄에 맞아 사망한 [[폴란드인]]도 6,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43년]] [[9월]]부터 [[10월]]까지 [[그리스]]의 친위대 및 경찰상급지도자로 부임한 슈트로프는 패전까지 라인 베스트마르크 친위대 및 경찰상급지도자로 일했다. == 전후 전범재판과 처형 == || [[파일:external/93fa4cd93d37268814a82faa8cf84c471002a3ba7b337ffab1087d42615d1650.jpg|width=100%]] || || 법정에서의 슈트로프 || 패전 후 [[1945년]] [[5월]]에 체포되어 미군 병사 살해혐의로 [[미군]] 군사법정에 세워져 [[1947년]] [[3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폴란드]] 정부로 인계된 슈트로프는 [[폴란드]]의 법정에 세워져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의 책임자로 다시 사형 판결을 받고는 [[1952년]] [[3월 6일]]에 [[바르샤바]]에서 처형되었다. == 매체에서 == * TV 영화 [[업라이징]]에서 [[존 보이트]]가 연기하였다. [[분류:1895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리페 군 출신 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질서경찰/인물]][[분류:교수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