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위(춘추시대) 군주)] |||||| '''{{{#ece5b6 위(衛)나라 11대 국군[br]{{{+1 무공}}}[br] 武公}}}''' |||||||||| |||| '''[[성씨|{{{#ece5b6 성}}}]]''' ||희(姬) || |||| '''[[본관|{{{#ece5b6 씨}}}]]''' ||위(衛) || |||| '''[[휘|{{{#ece5b6 휘}}}]]''' ||화(和) || |||| '''{{{#ece5b6 아버지}}}''' ||[[위희후]](衛僖侯) || || '''{{{#ece5b6 생몰 기간}}}''' || 음력 ||기원전 852년 ~ 기원전 758년 || || '''{{{#ece5b6 재위 기간}}}''' || 음력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위(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의 11대 [[군주]]. 휘는 화(和). 형인 위 공백(衛共伯)을 죽이고 위나라의 군주가 된다. [[위희후]]의 아들. [[위공백]]의 동생. == 생애 == ===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보위를 계승 중입니다. 형님]] === 위무공은 원래 위희후가 살아있을 당시에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무사들을 육성해 희후의 묘지에서 위 공백을 습격하니 위 공백은 세력이 모자라 더 저항할 수 없어 자결한다. 그 자리는 희화가 이었다. 그가 바로 위 무공이다. === 정사를 바로잡다 === 위무공은 위(衛)나라의 시조인 위 강숙의 정치를 바로잡아 국가를 안정시키니 위나라는 강성해졌다.[* 열국지에서 초기 위나라가 정나라나 송나라 등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무슨 일 때문인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정황은 알길이 없다. 그리고 42년의 세월이 흘러 [[주나라]]에서 대격변이 일어나는데...... === 주평왕을 도와 동천하다 === 위무공 42년(기원전 771년), 견융족(犬戎族)이 신후(申侯)[* 주유왕의 장인이다.] 녕(寧)의 사주를 받아 서주의 수도인 호경을 쳐서 [[유왕|주유왕]]과 [[정환공]]을 죽였다. 이에 위무공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 이때 같이 도우러 온 사람이 정환공의 아들 [[정무공]]과 [[진문후]], [[진양공(영성)|진양공]](秦襄公)이었다. 그리고 주유왕의 아들인 [[평왕|주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하는 것을 도와 동주가 시작되게 한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위 무공의 공로에 사례했다.[* 사기에서는 위 무공을 공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그 뒤에 군주가 위후로 불리는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애초에 공로자만 공작으로 삼고, 그 후손을 공작으로 세습하지 못하게 할 리 없으니 말이다.] 위무공 55년(기원전 758년), 위무공이 죽고 그 아들인 희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장공이다. [각주] [[분류:위(衞)나라의 군주]][[분류:기원전 852년 출생]][[분류:기원전 75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