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주서)] [include(틀:북사)] ||<-2> '''운양공(鄖襄公)[br]{{{+1 韋叔裕 | 위숙유}}}''' || || '''[[시호|{{{#fff 시호}}}]]''' ||양(襄) || || '''[[작위|{{{#fff 작호}}}]]''' ||운국공(鄖國公) || || '''성''' ||위(韋) || || '''이름''' ||숙유(叔裕) || || '''자''' ||효관(孝寬) || || '''부친''' ||위욱(韋旭) || || '''조부''' ||위직선(韋直善) || || '''출신''' ||경조(京兆) 두릉현(杜陵縣) || || '''생몰''' ||509년 ~ 58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주]]의 [[명장/아시아|명장]]으로, 이름은 관(寬), 또는 숙유 (叔裕), 자는 효관 (孝寬). 주로 자로 불리었고 [* 한자는 다르지만 그의 라이벌 격인 북제의 고장공 또한 효관(孝瓘)으로 불리었다.]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陵縣) 사람이다. 남북조 시기 [[서위]], [[북주]]의 장군으로 경조 위씨(京兆 韋氏) 운국공파의 시조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천성이 과묵하고 총명하며,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잘 생겼다는 뜻이다.] 어릴 적 조실부모하여 형수부부에 의지하였다. 20살 때 [[남제]](南齊) [[명제(남제)|명제]]의 6남 소보인(蕭寶夤)이 북위로 귀순한 뒤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선위장군(宣威將軍)을 제수받았다. 이후, [[형주|형주]]에서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우문태]]가 [[옹주(중국)|옹주]]를 도모하자, 동관(潼關)을 함락시키고 홍농군주(弘農郡主)가 되었다. 이후 동위의 침략을 격퇴해 장군들을 사로잡고, 거꾸로 [[예주]]를 공격하여 예주자사 풍옹(馮邕)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에 봉해졌다. 539년, 대도독이 되어 왕사정(王思政)과 함께 옥벽(玉壁)[* 산서성 직현]을 지키게 된다. 그 동안 그는 서위의 전략적 요충지인 옥벽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병사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 옥벽공방전 === [[동위]]의 생산력과 군사력이 서위에 비해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동위의 [[고환(남북조시대)|고환]](高歡)은 서위를 공격해 제국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전투는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고, 그동안 서위는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고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서위의 장군들이 대거 동위로 전향했고, 동위는 이 기회에 서위 진영 깊숙히 쳐들어 오지만, 원정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546년, 고환은 대규모 서위 원정을 실시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서위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그는 서위의 요충지이자 장안으로 가는 길목인 옥벽을 포위하였다. 성 안에는 병사가 수천 명밖에 없었는데 동위의 10만 대군이 밤낮으로 맹공을 퍼부었으나 위효관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고환은 서위 군사들이 분하(汾河)에서 물을 떠다 먹는 것을 알고 곧 사람을 보내 하루 만에 물길을 바꾸어버렸고, 이어 토산을 높이 쌓아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위효관은 성루 위에 있는 두 개의 정자를 새끼줄로 연결해 토산보다 더 높은 나무다리를 만들고는 돌과 불화살 등을 날려 접근을 막았다. 그러자, 고환은 땅굴을 파 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위효관은 커다란 도랑을 파서 이를 차단했다. 다시 고환이 충차를 만들어 성문을 부수려 하자, 위효관은 커다란 마포를 무수히 덧대 봉제한 거대한 휘장을 만든 뒤 병사들로 하여금 양쪽 끝을 잡아 위에서 내려뜨리게 하여 공성 병기의 위력을 상쇄시켰다. 동위의 군사들이 기다란 장대로 휘장을 불태우려 하자, 위효관 역시 기다란 장대에 예리한 칼을 매달아 적의 장대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고환은 병사들을 시켜 사방의 성벽 밑에 20개의 땅굴을 파고 거대한 기둥을 세워 불을 붙였다. 땅굴 속의 기둥이 불에 타 내려앉으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위효관은 무너져내린 성벽에 나무 목책을 세우고 뒤에 쇠뇌를 배치해 동위 군사의 진입을 저지하더니, 뒤이어 동위가 쌓은 토산까지 점령해버렸다. 성을 공략하는 방법이 모두 실패하자, 고환은 위효관의 투항을 종용하였다. > 그대가 고성孤城을 지키고 있으나 사방에서 구원하러 오는 자가 없으니 결국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루 속히 투항하느니만 못하다! 그러자 위효관이 답하길, > 우리의 성은 엄하고 튼튼한 데다 군량 역시 충분하다. 공성하는 자만 피곤하고 지키는 자는 여유가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너희들이 철군하지 않는 것이다. 관서의 사나이인 나 위효관은 절대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고환은 크게 분노하여 위효관의 목을 베는 자에게 태위의 벼슬과 개국공의 관작, 그리고 비단 1만필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으나, 성 안의 병사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동위는 옥벽성을 50여 일 동안 공격했으나 이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7만의 병사만 잃고 말았다.[* 대부분 땅굴이 무너져 죽은 병사들이다.] 547년 정월, 고환은 화병이 나 자리에 누웠다. 고환이 철군을 준비하자, 이 소식을 들은 위효관은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 고환을 저격했다는 소문을 냈다. 고환은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노래를 부르며 그의 군대 앞에 모습을 보였지만, 동위로 돌아가던 중 병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아들 [[고징]](高澄)에게 믿을만한 관료 명단을 내어주고,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侯景)을 대비하라고 일러둔 다음 숨을 거두었다. === 모략으로 명장을 굴복시키다 === 그럼에도 불구, 아직 [[북제]]의 군세가 [[북주]]보다 강함을 알고,[* 이 무렵, 곡률광의 활약으로 인해 자신이 지키던 옥벽마저 빼앗기고, 연이은 패배로 이득없이 병력만 소모되는 상황이었다.] 위효관은 첩보전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그는 부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하여, 북제에 파견한 첩자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재화를 아낌없이 사용해 내통자도 여럿 만들어서 북제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군사 허분(許盆)이 배반하였을 때는 즉시 첩자를 파견하여, 그를 암살하기도 했다. 569년, 진공(晋公) [[우문호]](宇文護)가 북제를 토벌하려 하자, 위효관은 아직 때가 아니므로 삼가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우문호는 듣지 않고 대군을 모아 출정했다. 그러나, 거꾸로 북제의 곡률광에게 당하여 본거지인 선양(宜陽)[* 현재의 허난성 뤄양시 이양현, 이 당시의 [[낙양]]은 북제와 북주의 국경 근처라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위효관은 제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선양이 비록 작은성이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함을 설득했고, 이에 호응한 장수들과 더불어 우문호를 구출했다. 이 공으로 그는 무제 [[우문옹]](宇文邕)으로 부터 운국공(鄖國公)의 시호와 함께 식읍 10,000호를 받았다. 같은 해, 북제가 다시 선양을 포위하자 이곳을 지켰는데, 북제의 명장 [[곡률광]](斛律光)이 있는 한, 북제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실각시키기로 한다. 위효관은 백승비상천 명월조장안(百升飛上天明月照長安)이란 동요를 꾸며 황실을 교란하고 고산붕곡수거(高山崩槲樹擧)라는 동요를 풀이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곡률광이 곧 북제의 황실을 차지하리라는 뜻을 퍼뜨렸는데, 이를 들은 북제의 황제 [[고위]](高緯)는 곡률광을 의심하여 주살하였다. 이는 고위로 하여금 [[차도살인|스스로 곡률광을 제거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 북제를 멸망시키다 === 572년, 우문옹은 북제 평정의 뜻을 나타내고, 위효관에게 그 계책을 묻자, 이에 3개의 계책을 내었다. > 첫째, 남조의 [[진(남조)|진(陳)]]을 멸망시켜 강남의 비옥한 땅을 기반으로 삼은 다음, 북제를 도모한다. > 둘째, 진과 동맹하여 북제를 협공한다. > 셋째, 진의 도움을 전혀 받지않고, 북주의 국력으로만 공략한다. 이에 무제는 세번째 계책을 택하고 위효관을 선봉으로 내세웠으나 그는 노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거절하였다. 급기야 위효관은 사직을 요청하였지만, 우문옹은 천하평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루어 달라며 거절했다. 576년, 무제 우문옹의 원정에 선봉이 된 그는 끝내 북제를 멸망시키고[* 이때의 경과는 [[고위]] 문서를 참조] 귀국하여 대사공(大司空) 연주총독(延州總督) 겸 상국이 되었다. 578년 그를 신임하던 우문옹이 죽자, 뒤를 이은 [[우문윤]](宇文贇)에 의해 숙청될 뻔하였으나 군공을 내세워 서주, 연주를 총괄하는 11주 오진제군사(十一州五鎭諸軍事)에 제수되었다. ===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신임 === 580년 [[문제(수)|양견]](楊堅)이 국정이 혼란해진 틈을 타 승상에 오르자, 울지형(尉遲逈)[* [[당나라|당나라]]의 공신인 [[울지경덕]]이 그의 일족이다. 울지형이 처형된 후, 울지씨는 모두 천민으로 강등되었는데, 울지경덕도 초기에는 천민으로 살았다.]이 옛 북제의 수도인 업(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양견은 위효관과 고경(高熲)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고 그에 호응했던 주와 군현들이 양견에 투항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진나라의 침공이 있자 이를 막아내고, 황족 우문량(宇文亮)의 반란마저 평정하였다. 그로 인해 아들이 활국공(滑国公)으로 봉해졌고 그 해 11월에 죽었다. 향년 72세. 사후, 대부(大傅) 12주제군사(十二州諸軍事) 옹주목(雍州牧)을 추증받는데 이는 양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탓이기도 하다. 위효관은 양견이 정권을 잡는데,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암묵적으로 그를 밀어주었고, 이후에는 양견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로 활약하였다. 위효관이 죽은 지 1년후, 양견은 제위를 선양받고 국호를 [[수나라|수(隨)]]로 바꾼다. == 평가 == [[자치통감]]에서 위효관에 대해 말하길 오랫동안 변방에 있으며 여러 차례 강적에 대항했는데, 경략하면서 계략을 꾸미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 일이 이루어지면 마침내 놀라고 탄복했다고 한다. 비록 군중에 있어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시력을 잃어 학사에게 낭독하게 하여 이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족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받은 녹봉은 자신이 가지지 않고 친족 및 고아에게 나누어 구제했다고 한다. == 여담 == '''[[위진남북조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장'''으로, 손수 최대의 [[북제|적]]을 섬멸하고, 더 나아가 향후 [[진(남조)|적]]이 될 수 있는 국가마저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 삼국지로 따지면 북벌에 성공한 [[제갈량]]이 [[옹주(중국)|옹]][[삼국지/지명/량주|양주]]를 성공적으로 경영하여 이를 기반으로 [[위(삼국시대)|위]]의 침공을 수차례 막아내고, [[사마의]]를 [[반간계]]로 실각시킨 다음, 중원 진출에 성공하여 위를 멸망시키고, 내친 김에 [[서주(중국)|서주]]방면에서 올라오던 [[오(삼국시대)|오나라]] 군대도 격파하여 재기 의지를 꺾어놓은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가 아니었다면, 5호16국 초기에 [[석륵]]이 [[유연(전조)|유연]]으로부터 독립하듯, 울지형이 하북지역을 기반으로 독립된 국가를 세울수도 있었다. 물론 운도 좋았던 게, 위효관은 [[고환(남북조시대)|라]][[곡률광|이]][[고장공|벌]]들이 스스로 무너질 만큼 장수했고, 이때 즈음 되면 [[남조]]는 [[북조]]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러모로 후대의 장군 [[곽자의]]와 비슷하다. [[천수]](天壽)를 누렸고, 계책에 능하지만, 군략에도 뛰어나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전공을 세웠다. 정치적으로도 모나지 않아,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정적마저 제일 먼저 그의 이름을 찾았다고 한다. 만일 그가 조금 더 젊은 장군이었다면, 그 뛰어난 능력과 인품으로 인해 여지없이 양견의 견제를 받았겠지만, 그러기엔 그는 너무 늙었고 야심이 없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09년 출생]][[분류:580년 사망]][[분류:경조 위씨]][[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