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魏勝, 1120~1164 [[남송]]의 항금명장. 자는 언위(彦威), 숙천(宿遷, 지금의 강소 숙천 서남) 사람으로,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생애 == === 뜻을 굽히지 않고 금에 대항하다 === 농민 출신으로, 정강 2년(1127년)에 금군이 송나라 변경을 함락하여 휘종과 흠종을 생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천은 금나라에 함락되었다. 고향 어른들이 금군에게 유린을 당하자 금군을 뼈저리게 원망하며 기량을 다져 고향 사람들의 복수를 맹세했고, 어른들에게 말타기, 활쏘기, 포 쏘기 등을 배웠다. 소흥 4년(1134년), 회초 일대에 [[한세충]]이 병사를 감독하고 있었고 위승은 6년 동안 초주를 다스렸는데, 그는 한세충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금에 대한 뼈아픈 원한을 품고 가족을 이끌고 초주로 이주해 궁수가 되었다. 소흥 10년(1140년), 항금승전보가 잇달아 전해져 변경을 되찾으려 할 때 고종은 제위를 지키려 애썼고, [[진회]]의 사주로 각 부에 공격을 중지시켰다. 소흥 11년(1141년) 5월 회중에서 10여 년 동안 금은 감히 범하지 못하던 한세충이 진강에 옮겨져 금에 저항하던 호황이 이렇게 매장된 것을 못마땅해 하는 위승이 금병의 동선을 살피고 그들의 정보를 염탐하려고 산양에 은신했다. 소흥화의 이후 늘 소금장수 및 장인으로 변장하여 회하를 건너 연수·해주에 이르렀고, 기주 등지에서 금의 군정을 염탐했다. === 지략으로 해주를 취하다 === 소흥 31년(1161년)에 다시 회수를 건너 정찰을 하던 도중 [[해릉양왕]]이 해주, 연수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양식과 기구를 모아 각지에서 징집하고 남침을 대거 징집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여 금병을 틈타 연수를 습격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기각되었다.[* 남송의 명신 [[우윤문]]도 완안량의 침공할 것을 간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이때 남송 정부는 금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그러자 자원한 의사 300명을 모아놓고 연설하여 밤새 회하를 건너 연수성을 점령한다. >지금 금나라 사람들은 일심으로 우리를 때리려 하지 않고, 우리도 그들을 때리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다. 연수성을 점령한 뒤 부하들에게 단 한 명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성안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고 백성들은 위승에게 호응했다. >연수는 송나라 땅이었다. 회북이 금에 점령된 후부터 사람들은 금에 유린당하였다. 내 고향 숙천이 연수가 함락된 것보다 앞서 망국노가 된 아픔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제 금주가 배신하고 또 남침을 원하니 너희는 조정에 복귀하지 말고 나와 함께 실지를 되찾으란 말이냐? 그의 군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꿈에도 송나라로 돌아가고 싶다. 위승의 충의군에는 수백 명이 참여했고, 연수민의 지지를 받아 충의군은 해주로 직진했다. 고문부는 위승이 연수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냈다. 해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떨어진 대이산으로 진군했을 때 위승이 칼을 휘두르며 앞장섰을 뿐 나머지 전사들은 뒤를 따라 용감하게 돌격했다. 고문부는 말을 몰아 달아나 성 안으로 물러났다. 충의군은 5~6백 명에 불과했지만 용감히 싸웠다. 이에 위승이 명하여 바닷가로 돌아가서 바다에서 상륙한 것처럼 꾸미고 부하들을 주성 사면에 깃발을 높이 세우고 불꽃을 많이 들어 의병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문부는 위승인마가 많은 줄 알고 놀라서 성문을 굳게 닫았고, 수천 군대의 병사가 있음에도 감히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백성들을 성으로 내몰아 그를 위해 성을 지켰다. 위승은 본 후에 이 한나라를 안다간사한 자가 겁도 없고 인심도 좋지 아니하여 각 성문에 사람을 보내어 수성 백성에게 백성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선전하여 수성 백성들은 기쁨이 하늘을 찌르자 성문을 열고 위승을 맞이했고, 자동으로 길잡이 역할을 하며 주아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고문부와 그 아들 안인은 천여 명의 치병을 거느리고 거역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위승은 수십 명의 용예지사를 성루에 등반시켰고, 자신은 부대를 이끌고 초문 안에서 고안인과 대전을 벌였다.충의군 용사는 일당십으로 고안인과 그 수하들을 모두 소멸시키고 고문부를 생포하였다. 해주를 점령한 후 권지주사가 되었다. 그는 유흉산, 회인, 수양, 동해의 여러 현에 사람을 보내 각지에서 망을 보고 귀순하였다.그리하여 조세를 면제하고 죄수를 석방하며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전사를 위로하였다.충의군은 군기가 엄숙하고 백성들의 추대를 받는다.위승은 스스로 도통제를 겸하여 충의를 널리 모아서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하였는데, 순일문만 해도 수천 장의 장사가 응모하였다.그는 부대를 5군으로 나눠 이를 상수에 보고하고 군복 기갑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초주 난지주 등은 금인이 남침에 배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정의 화의를 두려워하는 세력 때문에 이를 보고하지 못해 위승의 충의군은 무기를 공급받지 못했다. 병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군은 둥청을 통제하여 공격 준비를 하였다. 기주를 치자 위승은 탐정하고 동성에게 훈계한다. >우리는 지금 기갑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금군 수만 명이 기주로 향하니 장군님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성질이 급한 동성은 천여 명을 이끌고 기주를 습격하여 치열한 시가전으로 3천여 명을 참수하고 기갑을 얻었는데, 이때 금병 원군이 이미 도착하자 서둘러 인력으로 기갑을 나르고 후방을 직접 끊었다. 다만, 금병들이 지붕에 올라가 높은 곳에서 벽돌을 던지고 기와를 던져 거의 무너질 정도로 쳐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위승이 제때 호응해 주었기 때문에 비로소 위험에서 벗어났다. 사후에 동성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부대에 손해를 끼친 책임을 물어 그 죄는 마땅히 참수해 마땅한 것이었지만, 위승은 그를 생각하여 용맹을 떨치고 금인기갑을 차지하였다. 장수에 준해 죄를 상쇄하였다. === 금군에 위세를 떨치다 === 위승이 해주를 함락하고 무기를 탈취했다는 소식을 들은 완안량은 해주 동지몽안진국을 보내 만여 금병을 거느리고 해주를 공격했다. 위승은 이를 안 뒤 험한 곳에 복병을 배치하고 정병을 이끌고 해주에서 20리 떨어진 신교(新橋)까지 진격해 금군과 사투를 벌였다. 금병이 많은 세력을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바짝 다가서니 위승이 패한 척 싸우고 한 걸음 물러났다. 금군이 득의양양해 있을 때 갑자기 후대 복병이 대박을 치면서 금군은 일순간에 진을 쳤다.위가 팀을 이끌고 회마총을 쏘았다. 손쓸 틈도 없이 사령관이 위승에게 일격을 당해 죽었다. 사령관을 잃은 금군은 더욱 당황하여 천 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황급히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위승군은 더욱 위력을 떨쳤다. 산동 군민들은 모두 와서 부화뇌동하였다. 위승은 병마가 아직 적고 조정의 후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산동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잠시 모여서 집을 짓고 스스로 지키며 왕사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기주에는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창산에 거주했다. 금병이 오랫동안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여 구조 요청을 하자 위승은 즉시 군대를 나누어 갔다. 창산에 도착한 후, 금인 진지를 뚫고 곧장 진지로 향했다. 금군의 복병이 들이닥치자 위승은 손에 큰 칼을 들고 혼자 말을 타고 뒤를 끊어버렸다. 금나라 군대가 오백 기병으로 위승을 겹겹이 에워싸며 큰 칼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돌진하다가 포위망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수십 군데의 총상을 입었다. 금병이 뒤에서 화살을 쏘아 진채 문으로 들어가니 위승이 말을 타고 유시에 맞아 쓰러지자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진채로 들어가 금병 누구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교전하지 않는다.위승이 진중에 들어온 후 금나라 병사들은 더욱 공격하여 물길을 끊고 진중의 군민을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채의 식수가 다하자 위승이 군민을 거느리고 소와 말을 잡아 죽이고 피를 취하여 물로 삼아 투쟁을 계속하였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폭우가 쏟아지면서 금의 음모는 실패했고 오히려 진채 공략이 더 급해졌고 사방에 진을 쳤다. 위승의 이런 이례적인 행동은 위승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적이 반드시 해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이렇게 허세를 부렸다. 금병을 태우지 못한 위승은 금군을 피해 몰래 해주로 돌아가 분전했다. 얼마 후, 금은 과연 창산 둘레를 없애고 해주성 아래로 병사를 옮겼다. 선두 부대가 막 도착했을 때, 위승은 즉시 성 밖으로 나가 영전하며 연거푸 몇 번 승리를 거두었다. 나중에 금병들이 모두 와서 화살과 화살을 비오듯 쏘고 위승의 콧입술에 명중하여 상치를 깨뜨리자, 그는 비로소 성으로 철수하여 굳게 지휘하였다.금병이 많은 세력을 의지하여 해주를 겹겹이 에워싸고 사방을 맹렬히 공격했다. 위승은 전 성 군민을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으며, 간간이 어둠을 틈타 출격해 금병을 쉬지 못하게 했다. 금병이 7일 동안 해주에 포위 공격하였으나, 조금도 이득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상자가 막중하여 할 수 없이 떠나야 했다.이때부터 위승의 위력이 산동성에 진동하여 많은 금병들이 보기만 하면 수놓아졌다. '산동 위승'이라는 큰 깃발을 들고 황급히 물러났다. 위승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금인의 마음을 이용해 은밀히 깃발 수십 개를 만들어 제장들에게 건넸다.전투가 격렬할 때마다 그들은 힘껏 쳐냈다. '산동위승'이라는 깃발 아래 금군은 일순간에 허둥지둥 달아났다. 위승이 이끄는 충의군의 견제로 완안량은 거병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병력을 나눠 해주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위승이 처음 봉기했을 때, 주군의 군량과 군량도 없었고, 곡창고도 없었다. 그러나 해주에서 공상을 하며 곡식을 권하고 주세를 매겼으며 염강을 따져 군대의 공급을 보장했다. 그는 또 해주의 지형에 따라 성을 중하게 쌓고, 땅을 파고, 관문을 막고, 전차를 만들어 해주를 온전한 얼굴의 등받이에 묶는 망갈라로 만들었다. === 공동의 적에 공동으로 대항하다 === 위승의 충의군이 해주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수로를 흔들었지만 조정에서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이보는 아들 이공좌를 바다에서 보내 적정을 염탐하고 배를 타고 해주까지 간 뒤에야 위승이 나라를 위해 이렇게 큰 공을 세웠음을 알게 된다. 이보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조정에게 연주를 하면서 위승을 청하여 적을 무찌를 대책을 의논하였다. 위승은 이보에게 금병의 배는 모두 중원 백성들이 몰았고, 나는 그들의 가족에게 옷을 선물할 기회를 빌려 왕사가 공격하면 일격을 가하라고 했다. 이에 이보는 금병수군을 습격하기로 하고 먼저 양산도로 배를 몰고 가 금인기를 위장한 뒤 내응을 금영주사에게 알렸다.이튿날 북풍이 거세게 불자 금의 병사들은 창고에 숨어 추위를 피했다. 잠시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일부 김 병사가 나와 남쪽의 배가 눈에 띄었다.사공들은 저쪽이 금나라 수사네, 배 위 깃발 안 보이나?라고 속였다. 그 금병들이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금나라 명호라 의심치 아니하고 모두 선실로 숨어들었다. 이후 사공들이 신호를 걸었고, 이보는 바람을 타고 왔다. 송군이 가까워지자 사공들은 배를 버리고 해안으로 올라갔다. 송군은 금병주선에 뛰어올라 일찌감치 동유를 칠한 돛에 불을 질렀다. 돛이 타올랐다. 배가 동력을 잃었다.북에 가려진 그 금병들은 선체에 갇혀 싸울 수도, 도망칠 수도, 꼼짝없이 붙잡혔다. 이 전투에서 이보전은 금군을 섬멸하고, 금주사 선박 여러 척을 나포했다. 이보가 조정에 이를 보고하자 위승은 합문지후(合門至後)에 봉해졌고 해주(海州) 지주(知州) 겸 산동로(山東路) 충의군도통(忠義軍都統)에 정식 임명되었다. 이때 이보도 그의 주사를 이끌고 계속 해상으로 순찰을 나갔다. 금나라 군대의 대패 후 위승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고, 이보의 부대가 바다로 나가는 틈을 타 또 20만 명의 군사를 보내 해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위승의 부대가 아직 성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성밖의 백성들이 금병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으로 들어가 피신하려 하였다.수성통제곽울이 모습을 보이자 서둘러 성문을 닫았다. 성 밖에 백성이 들어오지 못하여 우마가 온 들판에 가득히 울부짖으며 땅을 쳤다고 한다. 위승은 곽울에게 "금군은 원래 나를 두려워했다. 이번에 그가 앞장섰던 10만 명의 부대가 내게 몇 천 명이 죽임을 당하자 다른 사람들은 놀라 도망쳤다. 성을 고수하기만 하면 적이 어찌 우리들을 못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곽울은 그제야 마음을 비우고 성문을 크게 열어 백성을 성으로 들여보내니라얼마 지나지 않아 금군은 해주를 포위했다. 위승과 곽울이 군사를 나누어 지휘하며, 깃발을 내리고 북을 치는 것을 아무도 없는 듯 적막하였다. 금군은 놀라서 며칠 동안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뒤쪽에는 구름사다리를 놓고 포석을 놓고 사방을 둘러쌓고, 흙을 메우고 참호를 메웠다.위승은 그 근성에 대하여 북을 치고 깃발을 올리고 화살과 돌을 다 쏘며 화우와 금액을 이어 삼일야로 금병을 가까이 할 수 없자 옛 방법을 강구하여 영루와 절수로를 쌓고 위승을 곤경에 빠뜨리려 하였으며, 위승은 끊임없이 출격하여 적을 괴롭히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이보에게 원조를 구하였다. [[이보(남송)|이보]](李寶)는 위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자개(張子蓋)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포위를 풀도록 명령했다. 얼마 후 장부의 기병이 달려와 위승의 군대 밖과 협공하여 금병을 대패시켰다. 위승은 장자개를 불러 승승장구했지만 이 직업군인은 해주 포위를 해제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 다른 임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위승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장자개가 철군하자 성 안의 백성들은 금병이 다시 올 것을 두려워하여 송군을 따라 남하하려고 분분히 성을 나섰다.위승일로는 대의를 알리고 연수군에 이르면 모두들 그의 성의에 감동해 그를 따라 해주로 돌아간다.얼마 후 금방의 내홍으로 온전한 안색이 죽임을 당하고 금병이 북쪽으로 돌아간다.이보주 사단도 남쪽으로 돌아갔다. 이때 위승은 해주에서 여단을 조련하고 병사를 강하게 했다.그는 또 북쪽에서 온 자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친지를 방문하여 함께 먹고 자라고 하였음을 의심치 않았다.심지어 금나라의 간첩까지 잡아들여도 말리고 술과 음식을 하사해 후한 증정품으로 돌려보냈다.이렇게 해서 산동과 하북 일대에 귀의자가 많이 모였다. 위승은 금나라 내부의 허실을 다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도독 장준은 위승을 건강(建康)으로 데려와 군무에 문의하여 '합문선찬사인(合門宣燦舍人)'으로 전했고, 산동로 충의군도통제 겸 진강부주둔어전군통제(鎭江府住御前軍統制)로 해주를 그대로 알고 있었다. === 격앙된 비가 === 융흥 원년(1163년), 조정에서는 위전을 보내 해주(海州)를 지키게 했고, 가화중의 부대를 해주로 이동시켰다. 가화중은 해주에 도착하여 위승의 부하들을 매수하려는 음모를 먼저 감행하여 위승과 부하들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 하였다. 위승은 이 사실을 알고 가와 시비를 가렸으나, 오히려 가화중으로부터 위승의 전횡을 도독부에 고발당하고 위승의 독단을 무마하지 않아 결국 산동로 충의군 도통제 등의 벼슬을 얻어 강군을 주둔시켰다. 가화중이 위승을 모함한 것이 들통난 후에야 복직하여 해주로 돌아가 머물게 되었다.이듬해 주화파가 득세해 해주가 다시 금나라로 편입되자 위승은 초주지주로 옮겨 청하구(지금의 회음시 청포구)의 군무를 전담하고 회동로 달래기사 유보의 절제를 받았다. 유보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재주를 기현하고 질투하는 놈으로, 초주에 가서 위승에게 소량의 군대만 몰아주고 전차를 거두어들였다. 금 병사에 대해서는 주화파의 뜻을 받들어 참고 양보만 했다. 금나라의 병사는 탈 만한 기회를 보이자 사주로 가서 배로 양식을 운반하겠다고 속여 청하구에서 회로 들어왔다. 위승은 이것이 남침의 음모임을 알고 유보에게 보고했으나 유보에 의해 기각당하고 금나라 병사는 기회를 틈타 기병을 보내 위승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위승은 본부 인마와 김병을 이끌고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승부를 기록했다.이때 또 많은 군대가 도착했다. 위승은 필사적으로 반격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유보에게 급한 일을 알린다. 유보는 "송금강이 화해를 하면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굴하게 말했다. 40리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유보는 병졸을 한 명도 보내지 않다. 위승의 부대는 화살을 다 썼지만, 여전히 토강을 진지로 삼아 적들과 힘들게 싸우고 있다.그는 유보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송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에서 전사할 줄 알았다. 당신들이 살아난다면 왕에게 보고하고 싶다. 이어 보병에게 먼저 철수하고 자신은 기병을 데리고 후방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기마병과 철수를 하며 싸웠는데 초주에서 불과 9km 떨어진 곳까지 물러갔을 때 이미 기진맥진했고, 더 이상 적진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서지 못해 위승을 비롯한 명장들이 죽었고 이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위승이 죽자 유보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효종은 유보의 가산을 몰수하고 경주로 좌천시켰다. 위승은 보령군절도사(保寧軍節度使)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아 진강부 강구진(江口鎭)에 '포충(包忠)'을 세웠으며, 그가 전사한 자리에 '포충사(砲忠祠)'를 세웠다.두 아들을 각별히 배려해 장남 위교에 무공대부(武功大夫), 충주자사(忠州刺史), 차남 위창(魏昌)을 승신랑(承信郞)으로 봉했다. 순희 15년(1188년) 송효종은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인재는 써봐야 능하다. 만약 변방이 없었다면 위승 같은 인재를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조서를 내려 위 교외에 임명된 데 이어 양절서로의 마보군 부총관으로 추증되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20년 출생]][[분류:116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