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초한쟁패기/인물]][[분류:한나라의 황족]][[분류:기원전 196년 사망]][[분류:전쟁 사망자]] [include(틀:사기)] [include(틀:한서)] 劉賈 (? ~기원전 196년) [목차] == 개요 == [[고제(전한)|유방]]의 사촌 형이며 [[초한쟁패]] 당시 유방의 장수로서 활약했다. == 생애 ==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신]]의 계책을 따라서 동진을 시작하자 휘하에서 종군했으며 삼진(三秦) 중 새나라를 평정할 때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이후 [[팽성대전]]에서는 [[항우]]의 기세에 박살난 듯 하지만 [[형양 · 성고 전역]]에서 군재를 발휘했다. 유방이 항우와 한타를 뜨는(...) 대신 낭중이었던 정충(鄭忠)의 말을 따라서 수비와 후방교란에 집중하기로 했고 유고와 [[노관]]에게 보병 2만과 기병 수백여명을 줬다. 이에 부응하여 백마진(白馬津)으로 침투하여 [[팽월]]과 기각지세를 이루고 한쪽이 수비군을 유인한 후 점령한 성으로 도망쳐 농성하고 그러는 동안 다른 한쪽이 빈 성을 점령하거나 쫓아오는 수비군을 포위섬멸하는 수법으로 [[서초(초한쟁패기)|초나라]]의 후방을 유린하는 것이 몇번씩 반복되자 팽성 주변의 성 수십개가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후방 보급선이 완전히 파괴된 [[항우]]는 유방을 궁지로 몰아넣고도 팽월과 유고를 막기 위해 회군해야 했으며, 이후로도 그전까지의 기세는 끝내 되찾지 못한다. 이후 견디지 못한 항우가 한왕 5년(기원전 202년)에 홍구(鴻溝)를 경계로 양 나라가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유방은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여 고릉(固陵)으로 진격하는데 유고는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고릉에서 유방과 따로 떨어져서 수춘(壽春)에 도착했고 여기서 이미 유방에게 붙은 [[영포]]와 함께 항우의 대사마였던 주은(周殷)이 배신하도록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주은은 항우가 후방인 수춘을 맡겼을 만큼 나름 신임하는 장수였던걸 감안하면 큰 공적을 세운 셈이다.] [[해하전투]]에도 참여해서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도 구강군의 군사를 거느려서 끝까지 개기던(...) 임강왕 [[공위]]를 죽이는데 공을 세웠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에 유방은 [[한신]]을 기존의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시켰고 대신 유방의 동생인 [[유교(전한)|유교]]와 유고가 각각 초나라, 형나라의 왕에 올랐다.[* 유교가 받은 땅을 제외한 회수 동쪽 52성을 봉토로 받았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유방의 친척들 중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재를 보였고 출세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결말이 그리 좋지 못했다. 고조 11년(기원전 196년)에 같이 싸운적도 있었던 회남왕 [[영포]]가 [[황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첫번째 공격 대상이 그가 된 것.[* [[한신]], [[팽월]]의 숙청을 보고 불안해진 것도 있겠지만 일단 영포 본인이 말한 이유는 황제 해보고 싶다는 것(...) 물론 가만히 있었어도 곧 [[여후]]에게 숙청당하는 신세였을 공산이 높다.] 행적을 봤을 때 싸움을 못하는건 아니었지만 도적패 시절과 [[항우]] 밑에서 맹장으로 쌓아 온 경력이 있는 영포한테는 당해낼 수 없었고 패배 후 달아나다가 영포의 군대에게 잡혀서 살해당했다. 형나라 땅과 남은 군대도 모조리 영포에게 빼앗겼다. 영포의 난이 진압된 후, 유고가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형나라는 폐지되고 전한에서 직접 통치를 시도했으나, 무리가 있어 나라 이름을 오(吳)로 고치고 고제의 조카 [[유비(오왕)|유비]]를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