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劉應龍 [[남송]] 말기의 인물로 자는 한신(漢臣). 서주(瑞州) 고안현(高安縣) 사람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1238년 진사에 급제하여 영릉현(零陵縣) 주부(主簿), 요주(饒州) 녹사참군(錄事參軍)으로 제수되었다. 당시 모륭(毛隆)이라는 이가 남을 업신여기고 협박을 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유응룡은 이때 도적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유응룡: 그대가 모륭인가? >도적: 내가 모륭이다. 뒤에 백성들이 관가에 호소하여 모륭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는데, 유응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도적이 진실로 모륭이라면 그 스스로 인정했겠는가? 유응룡은 자신의 판단을 주에 알렸지만, 주에서는 불가하다는 말을 전하며 다른 관리를 보냈고 모륭은 억지 자백을 한 끝에 결국 죽었다. 뒤에 도적들이 평정되자 유응룡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뒤에 유응룡은 지숭인현(知崇仁縣)으로 전임되었는데, 회서(淮西) 지역이 함락되고 강서(江西) 지역이 황폐화되자, 현의 보좌관은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달아났지만 유응룡은 굳게 지키며 물러나지 않았다. === 이종에게 직언을 올리다 === 당시 [[이종(송)|이종]]은 슬하의 아들들이 요절해서 자신의 조카이자 동생 [[조여예]]의 아들(훗날의 [[도종(송)|도종]])을 양자로 들여 태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오잠이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여 이종의 기분이 불편했다. 그리고 1260년, 남송 외부에서는 [[몽골 제국]]이 남송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조정에서는 [[정대전]]을 몰아내고 다시 오잠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오잠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때 이종과 오잠이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오잠: 의당 천도해야합니다. >이종: 경은 어떻게 할 것이오? >오잠: 소신은 마땅히 여기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이종: 경은 [[장방창]]이 되려고 하는 것이오? 이종의 물음에 오잠은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뒤에 몽골 제국군이 물러나자, 이종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오잠이 짐을 그르칠 뻔했소. 이 말을 한 이종은 오잠을 재상에서 파직시키고 오잠에게 분노했다. 유응룡은 아침에 임명을 받았다가 이종이 밤에 상주문의 원고를 꺼내 유응룡에게 건네고 오잠을 탄핵하라고 하자, 유응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잠은 본디 좋은 평판을 지녔지만 사안을 논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 뿐 사태에 직면할 때는 결단이 부족합니다. 시조 이래로 대신이 죄를 저질러도 일찍이 경망스럽게 대신을 주륙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일단 관대한 법령으로 처리하여 옥체를 보전하시길 바랍니다. 뒤에 [[정대전]]을 탄핵할 때 유응룡은 정대전을 폄적하여 귀양하도록 주청하며 다음의 상소를 올렸다. >안으로는 백성들의 질고를 구제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히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고, 밖으로는 討軍實 나라의 위신을 떨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유응룡은 시정에 대 언급하며 다음의 상소를 올렸다. >널리 곳집을 열어 백성들의 기근을 진휼하고, 상인들을 내왕하게 하여 백성들의 식생활을 돕고, 부유한 가문에 베풀기를 권하여 관적(官糴)을 돕고, 고과를 엄격하게 평가하여 백성들의 인구수를 조사하고, 재난을 점검하고 구휼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살리고, 도적들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재해를 구제하십시오. === 가사도와의 갈등 === 정대전이 몰락한 이후 남송의 재상이 된 [[가사도]]는 오잠을 미워했다. 당시 수도의 쌀값이 귀해지자 유응룡은 《권조가(勸糶歌)》를 지었는데, 한 환관이 유응룡의 《권조가》를 가지고 이종에게 보여주니 이종은 유응룡이 지은 것임을 묻고 가사도에게 쌀값이 높으니 마땅히 신속히 처리하도록 알렸다. 가사도는 쌀값이 높은 원인을 알고 유응룡에게 분노했다. 유응룡은 사농소경(司農少卿)으로 전임되었다가 이윽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손부봉(孫附鳳)의 탄핵으로 결국 수도를 떠났다. 1262년, 호남(湖南)에 기근이 일어나자 유응룡은 제거상평창(提擧常平倉)으로 기용되었고 흉년을 구제한 공으로 직보장각(直寶章閣)·광남동로전운판관(廣南東路轉運判官)으로 옮겼다. 또한 비서감(秘書監)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을 역임했고, 지융흥부(知隆興府) 겸 강서전운부사(江西轉運副使)를 맡으며 화적(和糴)으로 사들인 식량 20만 석을 면제하도록 상주하였으며, 임시로 호부시랑(戶部侍郞)을 맡으며 시강(侍講)을 겸임하였다. 가사도가 재상이 된 이후 황제가 낸 문제에 답변할 때 조금이라도 강직한 면을 드러낸 신하들이 쫓겨나자 유응룡은 이런 상황에 대해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이 오늘의 일을 보니 해야할 말이 많습니다. 근일 이래로 공손하고 엄숙하며 절조를 굳게 지키는 이들은 사안을 논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사안을 지적하여 개진하고 조금이라도 절박한 이들은 연이어 조정을 떠나는데, 어찌 양성(兩省)에서 지나치게 반박하여 의심을 키웁니까? 어찌 신하가 문제에 답변할 때 황제의 뜻을 어겨 신하의 두려움을 재촉합니까? 조정이 청명했을 때 간관들은 이미 의심과 두려움을 품었는데, 소신은 정직한 신하들이 압도되고 강직한 신하들이 혀를 차서 정말로 성세가 아니게 될까 두렵습니다. 결국 유응룡의 발언에 시종관과 양성의 관원들을 비롯한 이들이 분하여 이를 갈았다. 얼마 안 있어 유응룡은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의 신분으로 지건녕부(知建寧府)를 맡았으나 갑자기 사양했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노월(盧鉞)이 가사도에게 아첨해서 결국 물러났다. 뒤에 강동전운사(江東轉運使)로 기용되었으나 이마저도 그만두었다. ===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다 === 남해에서 도적들이 일어나자, 남송 조정은 이를 근심하여 이에 유응룡을 현모각대제(顯謨閣待制) 신분으로 지광주(知廣州)·광남동로경략안무사(廣南東路經略安撫使)로 삼았다. 남해의 도적들은 유응룡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났고, 유응룡은 도적들을 소탕하여 남해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뒤에 여러 차례 유응룡을 불러 호부시랑으로 임명하고 거듭 시독(侍讀)을 겸하게 하였으나, 유응룡은 7번 상소를 올려 벼슬을 사양했다. 1275년, 병부상서(兵部尙書)·보장각직학사(寶章閣直學士)·지감주(知贛州)로 옮기고 강서병마검할(江西兵馬鈐轄)·청해군절도사(靑海軍節度使)를 겸임하였으나 이쪽도 사양하고 구봉(九峰)에 은거하였다. 이후 알려진 행적은 알 수 없다. 유응룡의 아들인 유원고(劉元高) 또한 진사로 급제하여 지후관현(知侯官縣)이 되었는데, 유원고가 죽자 홍천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탄식했다. >조정이 1명의 어사를 잃었구나. [[분류:송나라/인물]][[분류:장시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