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2년 출생]] [[분류:1995년 사망]][[분류:부다페스트 출신 인물]][[분류:노벨물리학상 수상자]][[분류:헝가리의 물리학자]][[분류:미국의 물리학자]][[분류:이론물리학자]][[분류:헝가리계 미국인]][[분류: 프린스턴 대학교 재직]] [include(틀:노벨물리학상 역대 국가별 수상자)] [include(틀:역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수상자)] ||<-2> '''{{{+1 유진 폴 위그너}}}[br]Eugene Paul Wigner'''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유진 위그너 모습.png|width=100%]]}}} || || '''본명''' ||비그네르 예뇌 팔[br]Wigner Jenő Pál|| ||<|2> '''출생''' ||[[1902년]] [[11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2> '''사망''' ||[[1995년]] [[1월 1일]] (향년 92세)||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 '''직업''' ||이론물리학자||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헝가리)]|[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서명''' ||[[파일:유진 위그너 서명.jpg|width=200&bgcolor=#fff]]||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분야''' ||이론물리학[br] 원자물리학[br] 핵물리학[br] 고체물리학 || || '''소속''' ||[[괴팅겐 대학교]][br]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br][[프린스턴 대학교]][br][[맨해튼 계획]] || || '''주요 업적''' ||바르그만–위그너 방정식[br]반전성보존법칙[br]위그너 D-행렬[br]위그너-에카르트 정리[br][[위그너의 친구]][br]위그너 반원 분포[br]위그너 분류[br]위그너 분포 함수[br]위그너 함수[br]위그너 결정[br]위그너 효과[br]위그너 에너지[br]상대론적 브라이트–위그너 분포[br]수정된 위그너 분포 함수[br]위그너–데스파냐 부등성[br]가보르-위그너 변환[br]위그너 정리[br]요르단–위그너 변환[br]뉴턴–위그너 국소화[br]위그너–이뇌뉘 수축[br]위그너–자이츠 cell[br]위그너–자이츠 반경[br]토마스–위그너 회전[br]위그너–바일 변환[br]위그너–윌킨스 스펙트럼[br]6-j 심볼[br]9-j 심볼 || || '''수상''' ||공로 훈장 (1946)[br]플랭클린 메달 (1950)[br]엔리코 페르미 상 (1958)[br]평화를 위한 원자 상 (1959)[br]플랑크 메달 (1961)[br][[노벨 물리학상]] (1963)[br]미국 과학 훈장 (1969)[br]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1972)[br]위그너 메달 (1978) || ||<|3> '''배우자''' ||아멜리아 프랭크 (결혼 1936, 사망 1937) || ||메리 아네트 휠러 (결혼 1941, 사망 1977) || ||에일린 클레어패턴 해밀턴 (결혼 1979) || || '''자녀''' ||3명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수리물리학]]에 기여한 [[헝가리]]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그는 1937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특히 "기본 대칭 원리의 발견과 적용을 통해 원자핵과 기본 입자 이론에 기여한 공로"로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 생애 == [[베를린 공과 대학]]을 졸업한 위그너는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The Kaiser Wilhelm Institute)에서 카를 바이센베르크Karl Weissenberg와 리차드 베커Richard Becker의 조수로, 괴팅겐 대학교에서 다비드 힐베르트의 조수로 일했다. 위그너와 헤르만 바일은 군론, 특히 물리학의 대칭 이론을 물리학에 도입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순수 수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 분야에서 여러 수학적 정리를 저술했다. 특히 위그너 정리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의 초석이다. 그는 또한 원자핵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1930년 [[프린스턴 대학교]]는 [[존 폰 노이만]][* 위그너는 13살 때, 자기보다 한 살 어린 폰 노이만에게서 정수론과 집합론을 배웠다. 둘 다 대단한데 위그너가 왠지 진 느낌(...)]과 함께 위그너를 영입하여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위그너는 실라르드 레오 및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의 회의에 참여하여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를 작성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위그너는 독일의 핵무기 프로젝트가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두려워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동안 그는 우라늄을 무기급 플루토늄으로 전환하기 위한 원자로를 설계하는 임무를 맡은 팀을 이끌었다. 당시 원자로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고, 아직 결정적인 원자로는 없었다. 위그너는 듀폰이 원자로의 건설뿐만 아니라 설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는 1946년 초에 클린턴 연구소(현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연구 개발의 책임자가 되었지만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관료적 간섭에 좌절하고 프린스턴으로 돌아왔다. 전후 기간에 그는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국립과학재단|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수학 패널, [[미국 국립과학재단|국립과학재단]]의 물리학 패널,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일반 자문 위원회를,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재직했다. 말년에 그는 더 철학적이 되어 기술 수학 및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불합리한 효과(The Unrea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in Natural Science)》를 출판했다. 참고로 위그너의 여동생 마르짓 위그너(Margit Wigner, 1904~2002)는 [[폴 디랙]]과 결혼하였다. 폴 디랙은 위그너의 동료 물리학자로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