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f51ba 0%, #3f51ba 40%, #dc143c 60%, #dc143c)" '''유송의 망명 황족[br]{{{+1 劉昶 | 유창}}}''' }}} || || '''시호''' ||명(明) || || '''작호''' ||의양왕(義陽王) → 진희왕(晉熙王)[br]→ 단양왕(丹陽王) → 송왕(宋王) || || '''성''' ||유(劉) || || '''이름''' ||창(昶) || || '''자''' ||휴도(休道) || || '''부친''' ||부황 [[문제(유송)|문제]][br]모후 용화 사씨 || || '''출생''' ||436년 ~ 497년 || || '''국적''' ||[[송(남조)|유송]](劉宋) → [[북위]](北魏)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의 황족으로 자는 휴도(休道). 뒤에 [[북위]]로 망명했다. == 생애 == === 유송의 황족 === [[문제(유송)|문제]]의 9남으로 436년에 용화 사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445년에 의양왕으로 책봉되었다. 450년, 보국장군, 남팽성하비2군 태수가 되었다. 453년, [[유소(유송)|유소]]가 문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다. 이때 유창은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같은 해에 유준이 유소를 제거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이다. 유창은 효무제가 즉위한 뒤 태상으로 승진하고 동중랑장, 회계군 태수로 전출되었으며, 이윽고 감회계동양임해영가신안5군제군사가 되었다. 454년, 동양주가 설치되자 동양주 자사로 임명되고 동중랑장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며, 후장군으로 진호되었다. 457년, 비서감으로 임명되고 효기장군을 겸하였으며, 산기상시가 더해졌고 중군장군, 남팽성하비2군 태수로 옮겼다가 도독강주영주서양예주신채진희3군제군사, 전장군, 강주 자사로 전출되었다. 459년, 호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가 461년 중서령, 중군장군으로 전임되었다. 463년,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고 산기상시, 태상이 더해졌다. 효무제가 남쪽을 순행할 때 황태후가 탔던 배가 뒤집어지자, 유창은 죄를 받아 개부의동삼사가 삭탈되었으나 다시 직함을 받았다. 464년, 효무제가 사망하고 유자업이 즉위하니 이가 제5대 황제인 [[전폐제(유송)|전폐제]]이다. 유창은 전폐제가 즉위한 뒤 사지절, 도독서연남연청기유6주예주양군제군사, 정북장군, 서주 자사로 전출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개부의동삼사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 북위로의 망명 === 유창은 조급한 성격으로 이전 효무제에게 불손한 모습을 보여 효무제에게 잦은 책망을 받았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유창이 다른 뜻을 품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으며, 특히 전폐제가 재위한 465년에는 이런 소문이 더욱 떠돌았다. 유창은 측근인 거법생(籧法生)을 조정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전폐제는 이미 유의공을 주살한 이후였고 유창을 장차 제거하려고 했으며, 거법생이 조정으로 들어오자 거법생에게 유창의 배신을 왜 조정에 알리지 않았냐고 힐문했다. 전폐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창을 토벌하려고 하자, 유창은 거병하여 전폐제에게 저항하려고 했지만 호응이 없었기에 모친과 아내를 버리고 오직 첩과 60여 명의 사람들만 데리고 북위로 망명했다. 북위 조정은 유창을 무읍공주(武邑公主)에게 장가보내고 시중, 정남장군, 부마도위로 임명하였으며, 단양왕(丹陽王)으로 책봉했다. 이윽고 무읍공주가 죽자 다시 건흥장공주(建興長公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한편 유창이 망명한 이후 전폐제가 유욱의 궁중 쿠데타로 인해 죽고 유욱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유송)|명제]]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송(남조)/황족]][[분류:436년 출생]][[분류:497년 사망]][[분류:팽성 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