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전조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01F31 0%, #7C283F 20%, #7C283F 80%, #601F31); color: #ece5b6" '''전조 제3대 황제[br]{{{+1 열종 소무제 | 烈宗 昭武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刘聪.jpg|width=100%]]}}} || ||<|2> '''출생''' ||연대 미상 || ||[[서진]] [[산시성(산서성)|병주]] [[신저우시|신흥군]] 여치현[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신저우시]] 우타이현)|| ||<|2> '''사망''' ||[[318년]] [[8월 31일]] || ||[[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 [[린펀시|평양]] 황궁[br](現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린펀시]]) || || '''능묘''' ||선광릉(宣光陵) || ||<|2> '''재위기간''' ||'''{{{#ece5b6 제3대 황제}}}''' || ||[[310년]] [[9월 5일]] ~ [[318년]] [[8월 3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흉노|유(劉)]] || || '''휘''' ||총(聰) || || '''부모''' ||부황 [[유연(전조)|태조]][br]모후 광헌황후 || || '''형제자매''' ||7남 중 4남 || || '''배우자''' ||호연황후, 무효황후, 무선황후,[br]무덕황후, 상황후 2명, 좌황후 2명,[br]우황후 1명, 중황후 1명 || || '''자녀''' ||20남 || || '''신체 특징''' ||[[머리카락|2척(47cm)]][* 머리카락의 길이가 2척(47cm)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 || '''자''' ||현명(玄明) || || '''작호''' ||초왕(楚王) || || '''묘호''' ||'''[[열종]](烈宗)''' || || '''시호''' ||소무황제(昭武皇帝) || || '''연호''' ||광흥(光興, [[310년]] ~ [[311년]])[br]가평(嘉平, [[311년]] ~ [[315년]])[br][[건원]](建元, [[315년]] ~ [[316년]])[br]인가(麟嘉, [[316년]] ~ [[318년]]) || }}}}}}}}} || [목차] [clearfix] == 소개 ==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前趙)의 제3대 황제. 태조 광문제 [[유연]]의 3남[* 《[[진서]]》 <유총 재기>에는 4남이라고 되어 있다.]이자, 장부인 소생으로 [[자(이름)|자]]는 현명(玄明)이었다. == 생애 == 기록에 따르면 태어났을 때 왼쪽 귀에 있는 [[머리카락]]의 길이가 [[https://zh.wikipedia.org/wiki/刘聪#性格特徵|2척]][*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47cm 정도가 된다.]인 좋은 모습이었다. 유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학문을 좋아했고, 문장 능력과 병법에 뛰어나 문무를 모두 갖춘 신동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유연은 유독 그를 총애했으며 성장해서는 주로 낙양 공략전을 담당했다. 310년에 부황인 태조 광문제 유연이 붕어하고, 그의 장남이자 유총의 이복형인 [[유화(전조)|유화]]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화가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 등의 동생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했기에 유총은 모반을 일으켜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했다.('''하서정변''') 그 이전에 유총은 제위가 싫다면서 대신 부황 유연의 4남이자 이복동생이었던 북해왕 유예에게 제위를 주려고 했지만 유예가 울면서 거절하자 나중에 제위를 양보하겠다며 동궁에 거주하게 하고, 일단 황태제로 삼았다. 그런데 열종 소무제 유총은 황후인 호연씨는 놔두고, 엉뚱하게도 [[계모]]이자 유예의 모친이었던 단씨에게 눈길을 돌려 불륜을 저질렀다.[* 그런데 딱히 단씨가 거부하지 않은 걸 보면 단씨도 이걸 즐겼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원래 [[흉노]]족은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부인들을 차지하는 '''부사취수제'''가 있었기에 흉노 세계관으로 보면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총은 한족까지 다스리는 중화권의 황제였다.] 단씨는 이것을 아들 유예에게 들켜 한소리 듣고 소문까지 나자 병이 들어, 1년도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무엇보다 소무제 유총은 황음무도한 인간이었다. 한번은 태보 [[유은(전조)|유은]]의 집에 아주 아름다운 두 딸과 네 손녀가 있다는 것을 듣고 '''모두 취하여 입궁시킨 후, 매일 정사도 안 돌보고 여섯 미녀와 함께 지냈다.''' 그중 유은의 두 딸은 귀빈에 봉했는데 한 명에게는 '유영', 다른 한 명에게는 '유아'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건 '''그 유명한 [[요(삼황오제)|요]]임금의 두 딸이자 [[순(삼황오제)|순]]임금의 부인이었던 아황과 여영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즉, 스스로를 요임금과 순임금만큼의 명군으로 치켜 올린 것이었으며, 모든 권한을 두 귀빈에게 넘겨준 [[대인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불쌍하게도 존재감이 없었던 호연황후가 세상을 뜨자마자 좌귀빈 유영을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유총의 모후 장씨가 유영이 같은 유씨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대신 자기 동생의 딸들이자 유총의 이종사촌들인 장휘광과 장여광 자매를 궁중으로 불려들여 둘 중 한 명을 황후로 삼도록 했다. 유총은 할 수 없이 장휘광을 황후로 삼았고, 유영은 황후가 되지 못하자 홧병이 나서 죽었다. 또 소무제 유총은 변덕이 심해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일단 그는 [[갈족]] 장수 [[석륵]]과 한족 장수 [[왕미(전조)|왕미]] 등을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친척인 [[유요(전조)|유요]](劉曜)[* 태조 광문제 유연의 친척 조카.]와 호연안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도록 했다. 311년 4월, 소무제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회제|회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역사상 한족 최대의 치욕인 '''[[영가의 난]]'''이라 부르며 유총과 그의 부하들은 회제 사마치의 조카이자 태자[* 태자여서 착각할 수 있지만 회제 사마치는 아들이 없어 조카 사마전을 황태자로 삼았다.]인 사마전과 20,000여 명의 무고한 인명을 낙양에서 살육했다. 또한 [[왕미(전조)|왕미]]와 유요는 서진의 황릉을 도굴하고, 낙양의 화려한 황궁을 아예 불태워 버림으로써 [[동탁]] 이후 120년 동안 꾸준히 재건된 낙양은 다시 한번 잿더미가 되었다. 낙양을 함락시킨 이후 소무제 유총은 유요에게 관중의 장안에 세워진 서진 [[민제(서진)|민제]] 사마업의 임시 정부를 공격하게 했으며 석륵과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했다. 사실 소무제 유총은 낙양 함락 이전에는 정치를 그럭저럭했지만 낙양 함락 이후부터는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고 [[환관]]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또 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의 회제를 회계공으로 삼고, 자신의 첩을 주어 대접하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치마를 입히고 술을 따르게 하는 등 갖은 모욕을 준 후 살해했고,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이번에는 민제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대접하는 척하다가 마찬가지로 창을 잡게 하고 사냥을 나갈 때 맨 앞에서 걸어가게 하는 등 모욕을 준 뒤 317년에 살해했다. 이토록 황음무도하고 희노애락이 죽솥같았으며, 기강도 없고 잔인했던 소무제 유총 때문에 생모 장씨도 홧병으로 죽었고 결국 황후 장휘광도 이모인 장씨가 죽고 유총의 총애를 잃자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을 앓다가 죽었다. 이제 어머니의 간섭이 사라지자 유총은 죽은 좌귀빈 유영의 여동생인 유아를 황후로 앉혔는데 그나마 유총의 살인 본능을 줄여준 것이 이 유황후였다. 그녀는 바른 사람으로 유총에게 권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말렸는데 유총은 그녀를 총애했기에 말을 잘들었고, 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살려냈다.[* 대표적인 일로, 소무제 유총이 그녀를 위해 궁궐을 지어주려고 할 때 진원달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때 유황후가 심금을 울리는 상소로 진원달을 살게 해 준 일이 있었다. 대략 '''"폐하께선 신첩을 위해 그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데다가 반대하는 현명한 신하까지 죽게 되면 세상의 원망이 폐하 이상으로 제게 몰릴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신첩이 그렇게 욕먹고 괴로워하는 꼴을 보시면 폐하도 괴롭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운운하는 상소였다. 이걸 보면 유황후는 인품이 훌륭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유황후는 출산 중에 난산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도 소무제 유총은 달라지지 않았고 이번에는 한족 신하인 [[근준]]의 집에 갔다가 그의 두 딸인 근월광과 근월화 자매를 보고 눈이 돌아갔는데 근준은 일부러 이 미인계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둘은 마음이 맞아 유총은 근준의 딸을 그날 바로 황궁으로 데려가고 10일 후에는 황후로 삼았다.[* 이게 몇 년 후 소무제 유총의 씨가 마르게 되는 플래그가 되었다.] 한편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유씨 귀빈 두 명은 뒷방 신세였는데 유총은 두 사람을 위안해준다면서 그녀들을 좌황후와 우황후로 삼고 근월광은 상황후로 삼았다. 이렇게해서 '''한 명의 황제에게 세 명의 황후가 존재하는 동서고금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후무'는 아닌 것이 훗날 [[북주]]의 [[선제(북주)|선제]](宣帝) 우문윤은 다섯 명의 황후를 거느렸다.(...)] 그래도 소무제 유총은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들을 찾아다녔으며, 상황후 근월광은 독수공방을 하다가 몇몇 미소년들과 간통을 저지른 것이 걸려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이렇게 돼도 유총은 유총이었다. 그는 나중에 '''황후를 3명에서 7명까지 늘렸다.''' 근월화는 정황후, 근월화를 모시던 궁녀 번씨는 원래 유총의 모후 장씨의 시비였는데 죽은 근월광 대신 상황후가 되었고, 그 외에도 측황후, 하황후, 좌황후, 우황후, 중황후까지 봉해 7명을 한꺼번에 황후로 삼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는 많고, 한 명만 황후로 골라잡기 그러니 아예 무식하게 때려넣은 것이었다. 이렇게 황후가 많아지자 사람들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소무제 유총은 말년에 아들 [[유찬(전조)|유찬]]과 장인인 근준에게 정사를 완전히 맡기고 자신은 주색에 빠져 한나라는 쇠락해져 갔다. 확실히 유총의 재위기간은 한나라(전조)의 전성기이자 쇠퇴기로 [[막장]] 유총이 318년에 붕어하자, [[인플레]]가 폭발했다. 유총의 장남이었던 유찬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별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 답이 없었다. 막장스러운 황제 유총의 업보는 그가 붕어하고 난 이후, 죽은 그와 그의 자손들이 그대로 돌려받게 되었는데 그의 장인인 근준이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근준은 황제 유찬을 포함해서 유씨 황족을 모두 도륙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근준의 난''') 그러나 유요와 석륵의 신속한 반격으로 진압되었고, 도리어 근준과 근씨 일족이 도살당했다. 근준은 태조 광문제 유연과 열종 소무제 유총의 능인 영광릉과 선광릉을 파헤치고, 그들의 시체를 모독한 다음 목을 베고 관까지 불태웠는데 나중에 유요가 난을 진압하고 다시 개장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뜬금없이 촉한의 소열제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되었고, 유총이 서진을 멸망시킨 후,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유총,version=47)]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318년 사망]][[분류:산시성(섬서성) 출신 인물]][[분류:흉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