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관리]][[분류:1798년 출생]][[분류:1863년 사망]][[분류:해평 윤씨]] [include(틀:윤보선)] [목차] == 개요 == 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향년 65세) 조선 말기의 인물.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 관직은 [[중추부|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찬정에 추증되었다. [[윤두수]]의 7대손으로 그의 둘째 아들 윤흔(尹昕)의 6대손이며 [[윤득실]](尹得實)의 아들이다. [[윤치호]], [[윤보선]], 윤치왕, [[윤치영]]은 모두 윤취동의 후손이다. 거의 몰락한 윤치호 윤보선 가문이 일어설 토대, 배경을 만든 인물. 윤흔의 아들 윤취지의 5대손으로, 윤세겸(1668~1749)은 본부인에게서 윤옥(1694~1767), 윤학(1710~1770)을 낳고, 소실인 김해김씨에게서 6세에 서자 윤발(1728~1798), 윤침(1729~1785)을 얻었다. 본부인 해주정씨는 1739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윤발의 넷째 아들 윤득실이 그의 아버지. == 생애 == [[경기도]] [[수원]]에 살던 윤발과 윤득실은 그들의 집이 [[수원성]]에 편입되면서 보상을 받아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왔다. 그의 할아버지 윤발은 이 일로 잠깐 낭청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 윤득실은 통덕랑에 올랐지만 술을 좋아하여 병으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후손 [[윤영렬]]은 자기 자손들에게 술을 경계하라 했다고. 이는 윤보선의 회고록이나 윤치영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대목.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 윤교동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한다. 그는 [[아산군]] [[둔포면]]으로 분가해서 나가 살았고, 돈을 모아서 땅을 마련하였다. 언제쯤 땅을 마련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대에 그가 마련한 땅이 자손들의 성공의 밑천이 된 것은 확실하다. 본부인 고령신씨에게서 자녀가 없고, 후처 혹은 첩인 안동김씨에게서 두 명의 딸과 아들 [[윤웅렬]], [[윤영렬]]을 두는데 윤웅렬이 [[윤치호]]와, 한국의 초기 [[산부인과]]의사의 한사람인 윤치왕의 아버지이고, [[윤영렬]]은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의 아버지이자 [[윤보선]],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이며 서울대학교 부총장과 총장을 지낸 [[윤일선]]의 할아버지가 된다.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아산 염수대에 기도를 드리고 아들이 태어났다 하는데, 43세에 첫 아들 [[윤웅렬]]을 얻고 57세에 둘째 아들 [[윤영렬]]이 태어났다. 그러나 일설에는 윤영렬은 윤웅렬이 태어나고 3년만에 태어난 3년 [[터울]]이라고도 한다. == 기타 == 130년쯤 뒤에 태어나, 당대에 성공한 현대그룹 [[정주영]]과 비교되는 인물로, 다만 윤취동은 고아로 자라나서 돈을 모아 땅을 마련하고, 그 땅을 밑천삼아 후손들이 출세하는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서서히 집안을 명문반열로 올려놓은 것이, 당대에 한번에 집안을 일으킨 정주영과 차이점이라면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