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왕릉)] [[파일:서울_의릉_정자각_원경_미술_2011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 [목차] == 개요 == [[파일:서울_의릉_능침_전경(항공) 문화재청.jpg]] 懿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경종(조선)|경종]]과 [[선의왕후|선의왕후 어씨]]의 [[왕릉(무덤)|왕릉]]이다. [[효종(조선)|효종]]의 [[영릉(효종)|영릉]](寧陵)과 같은 양식인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인데,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일직선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반면에, 의릉은 완벽히 상하의 위치로 능이 배치되어 있다.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다.[* 위 항공 사진에서 곡장을 두른 능이 경종의 능이고, 앞 쪽 곡장이 없는 능이 선의왕후 능이다.] 의릉은 1970년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에 속해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참고.[[https://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34&mn=RT_01_07_01|#]].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영녕릉]], 선정릉처럼 여러 무덤이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달랑 있다. == 역사 == [[1724년]]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양주 중랑포 천장산 자락에 묻혔고, 뒤이어 선의왕후 어씨가 [[1730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 앞에 능을 조성했다. 경종의 뒤를 이었던 [[영조]]가 긴 재위 끝에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조선)|정조]] 16년에 윤구종이란 사람이 혜릉(惠陵)[*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단의왕후 심씨]]의 무덤으로 [[동구릉]] 내에 자리잡고 있다. 여담으로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하기 전 세상을 떠나 살아생전에 왕비가 되지 못했다.]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경종의 능호)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하였다. 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라면서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대 사람들도 영조가 경종에 대해 보인 우애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엄연히 경종 역시 한 시대의 국왕이었고 그 ‘[[삼종의 혈맥]](효종-[[현종(조선)|현종]]-[[숙종(조선)|숙종]])’을 이어받은 정통성이 보증된 군주였다. 반상 구분이나 예법 엄격하게 따지던 왕조국가 조선에서 '''국왕의 능침 앞에서 말 타고 지나가면서 내리지도 않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4114_004|관련 실록 기록]]) 이 '윤구종 사건'은 원래 정언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c_A1750_1_0018484|유성한]]이 정조에게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4018_003|전하께서 공부도 안하시고 여악이 난잡하게 노시는데 그래서야 되겠습니까?]]"'''라는 식의 불온한 상소[* 정조는 조선왕조 내에서 손에 꼽히는 공부벌레 임금으로 유명했기에 이 발언은 사실관계조차 무시한 모욕이었다.]를 올려서 신하들이 죄를 줄 것을 청하며 뒷배경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것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유성한이 과거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발언을 한 것과 유성한과 윤구종이 같은 패거리임을 거론하며 '''"경종 전하에게 충성을 다 하지 않는 역적 놈들이 사도세자를 핍박했는데 이런 자들이 경종과 영조, 사도세자에게는 충성했겠는가!"'''라는 주장을 하며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와 [[영남 만인소|사도세자의 추승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경종의 죽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일은 당시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치르는 일을 두고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인데, 이렇게까지 번진 것이다. 여담으로 이런 일을 촉발한 유성한은 주변의 탄핵 요구에도 정조가 벌을 주지 않았고,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12030_004|2년 뒤 세상을 떠났다]].] === 훼손 === [[파일:/image/047/2010/09/06/1283752142.672210_IE001232276_STD.jpg]] 중앙정보부에 의해 훼손된 시기의 의릉 1960년대 이 의릉 가까운 자리에 [[중앙정보부]] 이문동 청사[* 해외 파트 담당, 박정희 정권 하에서 악명을 떨친 국내 파트는 '남산'에 있었다...]가 들어섰을 때 중정 직원들이 능 앞에다 자기들 놀이터를 만들었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덤 앞에다 연못과 계곡을 만들고 거기다가 비단[[잉어]]를 풀었다. 실제로 연못을 밀어내기 전만 해도 의릉 매표소에서는 잉어 먹이를 팔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다 밀어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 의릉 주변에도 건물이 몇 있었지만(과거 중앙정보부 건물로 추정) 대부분 철거해 석관동 캠퍼스 자체가 이원화되어 있다. 게다가 남은 건물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http://kko.to/OPi9IlL6Y2|구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 링크 속 의릉 구역 안에 자리한 흰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여기서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 교통편 == 여담이지만 의릉은 택시 기사들도 그 위치를 잘 몰라서 의릉으로 가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기사들이 많고, '안기부 자리 가 주세요'라고 하거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요' 해야 가기 쉽다. 오늘날에도 서울에 오래 살았던 중장년층은 의릉 부지를 '안기부 자리'로 기억하며 그 당시에는 이 주변이 굉장히 삼엄했다고 회상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의 경우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이문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혹은 [[서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에서 하차하여 걸어가거나 7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 버스 120]], [[서울 버스 147]], [[서울 버스 1222]], [[서울 버스 261]]번을 타고 의릉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의릉, version=40)]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종(조선), version=345)] [[분류:조선왕릉]][[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서울특별시의 무덤]][[분류:성북구]][[분류:경종(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