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1891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파일:이강래(서울 독립운동가).jpg|width=300px]] || || 성명 ||이강래(李康來) || || 생몰 ||[[1891년]] [[11월 16일]] ~ [[1967년]] [[2월 19일]] || || [[출생지]] ||[[충청도]] 충주목[br](현 [[충청북도]] [[충주시]])[[http://m.joongdo.co.kr/view.php?key=20190120010007152|#]]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이강래는 1891년 11월 16일 한성부 서부 인달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본적을 두었으며, 누상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에 살기도 했다. 그는 1910년 [[서울공업고등학교|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중퇴하고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https://www.hangeul.or.kr/modules/bbs/index.php?code=bbs14&mode=view&id=21&page=6&___M_ID=167&sfield=&sword=|#]] 그후 1923년까지 문화운동을 통한 민족의 언어와 글을 수호하기 위하여 [[중국]] [[동삼성]]·[[연해주]]·[[일본]] 등을 순회하며 해외동포에게 한글 순회교육을 실시했으며, 1927년 12월 20일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여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황해도]] [[신천군|신천]]과 [[안악군|안악]] 등지를 순회하며 한글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또 개성 정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등 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한글 계몽에 힘쓰고 방언을 수집하는 등 한글의 문법연구와 보급에도 힘썼다. 1932년에는 《한글》 창간호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조선어 강습회 강사를 역임했다. 1935년 1월 1일 표준어사정위원(標準語査定委員)으로 참가하여 3년여간의 표준어사정을 통해 [[맞춤법|한글맞춤법]]통일안을 확정하는데 힘썼다. [[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37년 [[신흥우]] 등이 조직한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후 1938년 9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42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게 되자 간사(幹事)로 선임되어 모든 준비와 실무를 추진하였는데, 사전 완성단계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같은 해 10월 21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여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3년 9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에서 각각 교장 및 교감을 지내는 등 교원생활을 지속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1956년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로부터 교육 공로 표창을 수여받았고, 1967년 2월 19일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