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 보이그룹 일급비밀의 전 멤버, rd1=경하)] [[파일:이경하 초상.jpg|width=400]] 李景夏 [[1811년]]([[순조]] 11) [[1월 1일]] ~ [[1891년]]([[고종(조선)|고종]] 28) [* 선원속보에는 1892년 졸(卒)으로 등재되어 있다.] [[2월 1일]] (향년 80세)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字)는 여회(汝會),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광평대군]]의 후손이며, [[신정왕후]] 조씨의 인척이다. 초명은 이형하(李亨夏)였으나, 1863년 12월 16일 이경하(李景夏)로 [[https://sjw.history.go.kr/id/SJW-K00120160-02700|개명했다]]. 아들은 [[이범윤]](간도 관리사), [[이범진]], 손자는 [[헤이그 특사]] 중 한명인 [[이위종]]이다. 아들들과 손자는 훗날 독립운동에 헌신 했고 그 결과 세 명 모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 생애 == 1811년 1월 1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오위도총부 경력(五衛都摠府經歷, 종4품)을 지낸 아버지 이인달(李寅達, 1787. 7. 3 ~ 1819. 2. 18)과 어머니 [[해평 윤씨]](1789. 11. 20 ~ 1815. 2. 14) [* 윤이동(尹頤東)의 딸이다. 윤이동은 선원속보에 윤순동(尹順東)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정3품)를 지냈다.]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32년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종2품)을 지낸 조부 이복연(李復淵, 1765. 2. 17 ~ 1832. 9. 6)의 손자라고 해서 특별히 천거되어 초관(哨官, 종9품)에 제수되었다. 1834년에는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이듬해인 1835년([[헌종(조선)|헌종]] 1) 증광 [[무과]]에 병과 2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c_1835_022654|급제했다]]. 1849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863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뒤 호군(護軍, 정4품)에 올랐고, 1864년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정3품),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정3품) 등을 지내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용되어 총융사(摠戎使, 종2품),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종2품),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종2품), 겸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종2품), 겸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정3품) 등을 역임했다. 1865년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종2품)을 시작으로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정2품), 금위대장(禁衛大將, 종2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2품),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종2품), 한성부 좌윤(左尹, 종2품) 등을 역임했다. 1866년에는 [[형조판서]](정2품), 훈련대장(訓鍊大將, 종2품),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정2품), 순검사(巡檢使), 기보연해도순무사(畿輔沿海都巡撫使) 등을 역임하고 수원부 유수(留守, 종2품)에 부임하여 총리사(摠理使, 정2품)를 겸직했다. 이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고종에게 상방검을 받고 총지휘관이 되었다. 1868년에는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종2품)를 지냈다. 1869년에는 한성부 판윤(判尹, 정2품)을 거쳐 [[병조판서]]에 제수되어 금위대장·어영대장(御營大將)을 겸직했고, 1870년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종1품)를 겸직했다. 1871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정2품) 등을 역임했다. 특히 신미사옥으로 천주교도 박해가 한창이던 1871년 3월 어영대장·우변포도대장을 겸직하고 7월 권찰(權察) 좌우변포도대장(左右邊捕盜大將)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천주교도 및 불법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자들을 사형장에 보냈다. 이때 주로 낙동(駱洞)에 있는 자택에서 심문이 이뤄졌고, 매일 많은 사람들이 사형장으로 보내진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를 '낙동[[염라대왕|염라]](駱洞閻羅)'라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583|불렀다고 한다]]. 특히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이경하가 사람을 잘 죽이니까 기용했다는 식으로 흥선대원군과 이경하 모두를 [[디스(비판)|디스]]하기도 했다. > 이경하는 [[흥선대원군|대원군]]의 심부름을 가장 많이 했다. 그는 대장(大將)으로서 포도대장을 겸직하여 거의 빈 날 없이 형벌을 내려 살인을 했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이경하는 다른 장점은 없고 오직 사람을 잘 살해하기 때문에 기용한 것이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경하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사학도]](邪學徒)와 도주자(盜鑄者, 화폐를 불법으로 주조하는 자) 등 사형당할 만한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李景夏最被雲峴器使, 以大將兼管捕將, 刑殺無虛日, 雲峴嘗曰, 李景夏無他長, 惟善殺人故可用, 或曰景夏非濫殺, 皆邪學·盜鑄可死者爾) >---- >[[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甲午以前) 상(上). [[http://db.history.go.kr/id/sa_001r_0010_0010_0240|#]] 1877년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정2품)을 거쳐 강화부 유수,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1878년 진무사(鎭撫使), 1880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1881년 [[공조판서]]를 거쳐 무위대장(武衛大將), 경리사(經理事)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1882년 6월 9일 자신의 휘하에 있던 무위영(武衛營) 소속 군졸들이 주축이 되어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무위영의 총책임자로서 관리감독을 허술하게 하고, 본 임무인 궁궐 수비를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미수에 대한 책임까지 가중되었고, 결국 도봉소 당상(都捧所堂上) [[심순택]],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민겸호]]와 함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06A_09A_00150_2004_096_XML|파직되었다]].[* 직후 무위대장의 직책은 경리사(經理事)로 있던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에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06A_09A_00140_2004_096_XML|돌아갔다]].] 6월 11일에는 판삼군부사에 임명되었다가 7월 17일 [[전라도]] [[강진군|강진현]] [[고금도]]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07A_18A_00110_2004_096_XML|유배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어영대장으로 있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23&docId=560575&categoryId=46623|신정희]](申正熙) 또한 전라도 [[영광군]] [[임자면|임자도]]에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낙동(駱洞)에 있던 자신의 집을 [[청나라]]에 빼앗겼는데, 이 집터에는 훗날 [[주한중국대사관]]이 들어선다. 8월 19일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을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로 형벌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08A_19A_00270_2004_096_XML|격상되었고]], 같은 달 23일 가극(加棘,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더 둘러 침)으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08A_23A_00190_2004_096_XML|격상되었다]]. 1883년 4월 29일, 유배형에서 풀려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0_04A_29A_00100_2004_100_XML|고향으로 쫓겨났다가]] 그해 8월 2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0_08A_02A_00300_2004_102_XML|사면되었고]], 1884년 5월 14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1_05A_14A_00150_2004_105_XML|완전히 석방되어]] 10월 21일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면서 조정에 복귀했다. 이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좌변포도대장,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등을 역임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는 친군전영사 겸 좌변포도대장으로 신정왕후와 세자(후의 순종), 명성황후 등을 셋째 아들 [[이범진]][* [[이완용]]과 함께 구한말 친[[러시아|러]]파 대신이었던 인물. 다만 훗날 친일파에 매국노로 변절하는 이완용과 달리, 의병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가 [[경술국치]] 때 권총으로 자결했다.]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갑신정변이 진압된 직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1891년 와병으로 향년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고종으로부터 양숙(襄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여담 == * 평소 글씨를 잘 썼는지 1865년(고종 2) 9월 17일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이경하를 [[경복궁 건춘문]]의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02_09A_17A_00100_2004_012_XML|차출하기도 했다.]] == 대중매체 == *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최삼이 연기했다. *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김주영(1952)|김주영]]이 연기했다. [[분류:조선의 무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광평대군파]][[분류:1811년 출생]][[분류:189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