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e8b57 0%, #2e8b57 0%, #2e8b57 80%, #2e8b57)" '''농서장무왕(隴西莊武王)[br]{{{+1 李繼勳 | 이계훈}}}'''}}} || || '''작위''' ||농서군왕(隴西郡王)^^추봉^^ || || '''시호''' ||장무(莊武) || || '''최종직위''' ||중서령(中書令)^^추증^^ || || '''성''' ||이(李) || || '''이름''' ||계훈(繼勳) || ||<|2> '''출생''' ||916년 || ||[[후량]] 대명부(大名府) 원성현(元城縣) || ||<|2> '''사망''' ||977년 || ||[[북송]]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대십국시대]], [[북송]]시대의 무관. == 생애 == === 후주 시기 === 대명부 원성현 출신이다. [[곽위]]가 업성에 진수할 때 이계훈은 곽위의 밑으로 들어가 그의 부하가 되었다. 시영이 [[남당]]을 친정할 때 이계훈은 군대를 거느려 수주성(壽州城) 남쪽에 주둔하고 동옥(洞屋)과 운제(雲梯)를 건조하여 수주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게을리 하여 [[남당]]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수만 명이 죽고 운제와 동옥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계훈은 조정으로 복귀하여 하양삼성절도사(河陽三城節度使)로 전출되었다. 시영이 수춘에서 돌아온 뒤 이계훈은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으로 좌천되었고 또한 이계훈의 장서기(掌書記)인 진남금(陳南金)은 이계훈을 보조할 때 공을 세우지 않아서 이계훈과 더불어 쫓아냈다. 957년, 다시 시영의 남정에 종군하여 영란(迎鑾)에 이르러 이계훈은 시영의 명을 받아 흑룡선(黑龍船) 30척을 이끌고 강구난(江口灘)으로 출병하여 남당의 군사 수백 명을 물리치고 전선 2척을 노획하였으며, 공적을 세워 좌영군위상장군(左領軍衛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우우림통군(右羽林統軍)으로 전임되었다. 959년, 시영이 창주(滄州)를 정벌할 때 이계훈은 전도좌상도부서(戰棹左廂都部署)로 임명되고 택주자사(澤州刺史)였던 유홍(劉洪)이 이계훈을 보좌하였으며, 뒤에 임시로 형주(邢州)의 사무를 맡았다. 시종훈이 즉위한 뒤 안국군절도사(安國軍節度使)로 제수되고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더해졌다. === 북송 시기 === 960년 [[북송|송나라]]가 건국된 뒤, 이계훈은 검교태위가 더해졌다. [[태조(송)|태조 조광윤]]이 [[이균]]의 난을 평정할 때, 이계훈은 행재소에서 조광윤을 조현하고 소의군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공격하여 [[핑야오현|평요현]]을 불태우고 수많은 이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961년, 다시 북한의 군대를 물리치고 요주(遼州) 자사 부연언(傅延彦)과 부연언의 아우인 부연훈(傅延勳)을 사로잡아 바쳤다. 964년, 강연소(康延沼), 윤훈(尹訓)과 함께 다시 요주를 공격하여 북한의 장수인 학귀초(郝貴超)가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이들까지 모두 격파하였으며, 요주의 장수인 두연도(杜延韜), 기진(冀進) 등의 항복을 받아낸다. 북한이 [[요나라]]와 연합하여 다시 요주를 취하러 침입하자, 이계훈은 [[나언괴]], 곽진(郭進), [[조빈(북송)|조빈]] 등과 함께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 군대를 물리쳤다. 967년, 동평장사가 더해졌다. 968년 태조가 북한 정벌을 준비할 때 이계훈을 행영전군도부서(行營前軍都部署)로 삼았고 이계훈은 와하(渦河)에서 북한의 군대를 물리쳤다. 969년, 북송이 북한을 정벌하면서 이계훈을 하동행영전군도부서로 임명하였고, 이계훈은 이때 북한 정벌에서 남쪽 방면을 맡았다. 970년, 대명부에 진수하였다. 976년, 이계훈은 시중(侍中)을 겸하였다. 그러나 직후 이계훈은 병에 걸려 낙양으로 돌아가기를 주청하였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주청하였고, 이계훈은 태자태사로 물러났다. 이계훈은 977년에 사망하여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되고 농서군왕(隴西郡王)으로 추봉되고 장무(莊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 기타 == 이계훈은 여러 차례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며 이르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지 않았지만 소박함과 강직함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계훈은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태조와 친분이 있었기에 특별히 총애와 대우를 받았다. [[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송나라의 추존 왕]][[분류:916년 출생]][[분류:977년 사망]][[분류:한단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