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관용}}}'''[br]'''李灌鎔[* 문헌에 따라 李灌'''{{{+1 溶}}}''', 李'''{{{+1 瓘}}}'''鎔, 李'''{{{+1 鑵}}}'''鎔, 李'''{{{+1 冠}}}'''鎔, 李灌'''{{{+1 龍}}}'''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관용 박사.png|width=100%]][br]{{{-1 1933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왼쪽)[[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81400239102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08-14&officeId=00023&pageNo=2&printNo=4378&publishType=00010|#]][br]과 같은 날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오른쪽)[[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8140020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4&officeId=00020&pageNo=2&printNo=4551&publishType=00020|#]] }}}}}} || || '''본관''' ||[[전주 이씨]][* 경창군파 11세 용(鎔) 항렬.] || ||<|2> '''출생''' ||[[1891년]] [[7월 15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1885|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http://db.history.go.kr/id/im_108_02091|왜정시대인물사료]] 참조.][* 《전주 이씨 경창군파 족보》와 선원속보에는 1891년 음력 5월 20일(양력 6월 26일)생으로 등재되어 있고, [[취리히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학위논문에 첨부한 이력서에는 189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http://eurasiatour.info/index.php/en/asia/311-1|#]]] || ||[[한성부]] 동부 창선방 동학동계 동학동[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12번지)[* [[http://db.history.go.kr/id/im_108_02091|#]]] || ||<|2> '''사망''' ||[[1933년]] [[8월 13일]] (향년 42세) || ||[[함경북도]] [[청진시|청진부]] || || '''부모''' ||아버지 [[이재곤(1859)|이재곤]] || || '''형제''' ||남동생 [[이순용]] || || '''학력''' ||[[서울미동초등학교|공립한성소학교]] {{{-2 (중퇴)}}}[br]도쿄부관립제4중학교 {{{-2 (중퇴)}}}[br][[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전수학교]] {{{-2 (졸업)}}}[br][[옥스퍼드 대학교]] {{{-2 ([[문학]] / 중퇴)}}}[br][[취리히 대학교]] {{{-2 ([[철학]] / [[박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철학자]], [[언론인]].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이재곤(1859)|이재곤]]의 4남이다.''' 즉, '''아버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아들은 독립운동가'''이다. 이관용의 아랫동생 [[이순용]]도 독립운동을 했다. 저런 경우는 생각보다 종종 일어난다.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이다.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침내는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 게 되는 것.[* 이외에도 이관용의 손자 뻘 친척 [[이철주(1922)|이철주]](이관용의 혈연 상 큰아버지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의 증손자),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 민규현의 아들 [[민태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주도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이었던, 한마디로 한국으로 치면 [[일진회]] 회원이랑 다를 바 없던 인물이었다. 매국노 가족 출신은 아니긴 하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나 [[카메룬]]의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처럼 식민지배국을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이 후에 독립운동가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 매국노 자식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모처럼 반민족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관용의 집안은 [[조선]] 14대 왕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종가]]이다. 왕실 직계와는 300년 전에 갈라져 사실상 남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관용의 큰아버지이자 [[이재곤(1859)|이재곤]]의 형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이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완순군의 생가인 그의 집안 역시 가까운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 생애 == [[경기고등학교|공립한성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일본 제국|일본]] 도쿄부관립제4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귀국한 뒤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해 1913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3월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1916년에 [[스위스]]로 옮겨가 이듬해 [[취리히 대학교]]에 입학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19년에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로 건너가 [[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만들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참석하려 했으나 [[열강]]들의 무시로 실패했고, 같은 해 7월에 국제사회주의자회의인 루체른 회의의 의장에게 [[일본 제국|일제]] 침략 비판 및 회의 참가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뒤 [[조소앙]]과 함께 대표로 참가했다. 이 때 한국민족독립결정서를 제출했다. 그해 8월에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자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했고, 한 달 뒤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합쳐져 구미외교위원부[*A 구(歐)는 [[유럽]]을 뜻한다. 예전엔 유럽을 음차해서 구라파(歐羅巴)로 불렀다.]로 개편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 직원이 되어 10월까지 활동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20년 1월에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A]으로 임명받아 [[스위스]] 국제적십자회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적십자사에게 항의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했고, 이듬해인 1921년에 취리히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6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스위스]]에 있던 이관용을 [[영국]]과 [[프랑스]]에 보내기로 뜻을 모았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2년 후인 1923년에 같은 대학에서 [[논문]]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유럽 대학 박사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철학 박사가 되었다.''' 그해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견학했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동아일보]]〉에 [[기자]]로 취직했고, 같은 해 5월부터는 [[연세대학교/역사#s-3|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를 겸했다. 1924년 3월에는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발기회 [[이사]]로 선임받았으며, 10월에는 조선기아구제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25년 2월에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갔고 [[러시아]] 및 [[유럽]]에서 취재활동을 했다. 그리고 1925년 7월에 [[바이마르 공화국|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동생 이운용과 같이 귀국했다. 이때 [[상하이]]에 들러 [[이시영(정치인)|이시영]]과 만났다.[* 출처: 조선총독부 정탐 보고.] 돌아온 후 태평양문제연구회 위원직을 맡았고, 1926년 3월에는 〈[[조선중앙일보|시대일보]]〉 부사장이 되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27년 1월에 [[신간회]]를 설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한 달 뒤에 [[간사]]가 되었다. 그해 12월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임시집행부 서기장이 되었고, 같은 달에 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회에서 성명서 작성위원으로 선출받았다. 이때 같이 활동한 사람이 [[홍명희]], 김기전이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28년에는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다음해 2월에는 〈[[조선일보]]〉 난징특파원으로 발령받아 [[중화민국|중국]]에 갔다. 그때 북만조선농민개척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귀국 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일본 제국|일제]] 관헌을 규탄하고 [[한국독립운동|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래서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1931년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복역하다가 1932년 1월에 가출옥했다. 석방 후 철학연구회 회원 및 〈[[조선일보]]〉 편집고문 직을 맡았고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에서 일하는 등[[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5250020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05-25&officeId=00020&pageNo=2&printNo=4470&publishType=00020|#]][[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_(%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1933년 8월 13일에 [[함경북도]] [[청진시|청진]]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풍랑에 휩쓸려 [[익사]]했다. == 사후 == 사망 3일 후인 8월 16일에 유해가 [[청량리역]]에 도착했고 그날 오전 8시에 역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81600209202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6&officeId=00020&pageNo=2&printNo=4553&publishType=00020|#]] [[경기도]] [[고양시|고양군]] 뚝도면 광장리[*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같은 달 19일에 이관용의 추도회가 [[경성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사회는 [[홍명희]]가, 식사[* 式辭. 밥먹는 거 말고(...) 식장에서 그 식에 대해 인사말하는 것을 말한다.]는 [[여운형]]이 맡았다. 이외에도 약력보고는 [[주요한]], 추도사는 [[유억겸]], [[조병옥]], [[허헌]],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등이 읽는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81800209202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8&officeId=00020&pageNo=2&printNo=4555&publishType=00020|#]] [[한국독립운동|독립운동]]의 공으로 2007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았고 2008년 1월 20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 가족과 후손 == 연상인 [[기계 유씨]](1890 ~ 1932)와 [[혼인]]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 [[파일:이원조와 이해순.png|width=100%]] || || 잡지 《여성》 - 1936년 5월 호에 실린[br]큰사위 이원조와 큰딸 이해순[* 출처: 장문석 著, 《댄디와 양반 - 여천 이원조 연구(1)》 p.311] || 큰딸 이해순(李海順)은 1911년 생으로, [[이육사]] 시인의 동생 [[이원조]]와 결혼했다.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조선/왕사|왕실]]에서 [[퇴계 이황]] 가문[* 이육사 - 이원조 형제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과 인연을 맺고자 먼저 결혼을 제안했다고 하며[*B 출처: 장문석 著, 《댄디와 양반 - 여천 이원조 연구(1)》 p.303], 이에 [[정인보]]가 이원조를 낙점하여 중매해주었다고 한다.[* 출처: 장문석 著, 《식민지 출판과 양반 - 1930년대 신조선사의 고문헌 출판 활동과 전통 지식의 식민지 공공성》 p.379] 둘째딸 이해숙(李海淑)은 최정묵과 결혼했으며 [[6.25 전쟁]] 때 [[월북]]했다.[*B] 아들은 이해인(李海寅)이다. 1929년 생으로, [[6.25 전쟁]] 때 [[실종]]되어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자녀도 없어 이관용의 남계 후손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할 때 유족을 찾지 못해 한동안 훈장 전달을 못했다가 2009년 1월에야 조카 이해석[* 이관용의 동생 이운용의 친자이자 맏형 이원용의 양자.]에게 주었다.[[https://www.mpva.go.kr/mpva/selectBbsNttView.do?key=1543&bbsNo=213&nttNo=56676&searchCtgry=&searchCnd=all&searchKrwd=&pageIndex=1&integrDeptCode=|#]]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재곤(1859), version=130)]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경창군파]][[분류:1891년 출생]][[분류:1933년 사망]][[분류:익사한 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연세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