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공군 창설 간부 7인)] [include(틀:공군사관학교장)] [include(틀:태극무공훈장)] 李根晳 [[1917년]] [[1월 17일]] ~ [[1950년]] [[7월 4일]] (향년 33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창씨명은 [[아오키]] 모토미츠(青木根晳). == 생애 ==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청산면 구원리(現 [[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운봉리)에서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058|태어났다]].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이듬해인 1934년 [[일본]] [[쿠마가야시|쿠마가야]](熊谷)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2기생으로 입교해 그곳에서 비행술을 배운 뒤 같은 해 졸업하였다. 그를 담당한 교관은 그가 조종술에 대단히 뛰어났다고 평했다고 한다. 이후 제64비행전대 [[요시오카]](吉岡) 전투비행부대에 배속되었고, [[Ki-27]] [[전투조종사]]로서 참전하여 첫 출격에서 격추를 기록하였으며 그때부터 [[관동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만주]]에서 근무하면서 [[국민혁명군]] 소속 전투기 18대를 격추시키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후 제77비행전대 소속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출되었으며 [[영국 공군]]을 상대로 5대를 추가로 격추시키는 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1941년]] [[12월 25일]]에 영국 공군 제67비행대대 소속의 [[F2A|브루스터 버팔로]]에게 격추되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4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낙하산]]이 나무에 걸려서 매달려 있다가(...) 잡혔다고 한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김정렬(1917)|김정렬]]·[[최용덕]]·[[장덕창]]·[[이영무]]·[[박범집]]·[[김영환(군인)|김영환]]과 함께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항공부대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군번 50003] 그러나 미 군정은 그들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서 기초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1948년]] 5월 5일에는 경기도 고양군 수색 소재 조선경비대 제1여단 사령부 내에 항공부대의 모체인 항공기지부대가 편성되어 통위부에 편입되었다. 이근석은 5월 14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항공총감부에 배속. 7월 9일에 항공기지부대 초대 부대장이었던 백인엽 [[소령]]이 제4여단으로 전출되고 후임부대장으로 최용덕 [[대위]]가 부임되자 이근석은 [[군수참모]]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9년]] [[10월 1일]]에 [[대한민국 공군|공군]]이 [[대한민국 육군|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나오자 제2대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1950년]] [[5월 1일]]까지 역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비행단장]]에 보임되어 당시 보유중이던 10대의 건국호([[노스 아메리칸 T-6 텍산|T-6]])를 3개 편대로 편성, 직접 지휘하여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공격 방향을 고려하여 3개 편대를 [[경기도]] [[개성시|개성부]](現 [[개성시]])·[[파주군]] [[문산읍(파주)|임진면]](現 [[파주시]] [[문산읍(파주)|문산읍]]) 방면과 [[양주군]] [[의정부시|의정부읍]](現 [[의정부시]])·양주군 [[동두천시|이담면]](現 [[동두천시]])·[[포천시|포천군]](現 [[포천시]]) 방면, [[강원도]] [[춘천시]] 방면으로 출격시켜 조선인민군을 정찰하는 정보획득·위협비행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단순 정찰로 적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음을 인지한 이근석 대령은 건국기 육군 병기창에서 제조한 15kg의 국산 폭탄을 싣고 저고도로 비행하며 적진에 투하하는 작전을 지시하여 직접 폭격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 공군의 공중폭격은 당시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폭탄 274개 전량을 소모할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군 공군]]은 개전 당시 이미 항공기 200여 대와 2,200명의 병력을 갖추어 질적, 양적으로 한국 공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제대로 된 방공망도 구성되지 않은 남한 상공을 유유히 비행하여 개전 당일 서울특별시 상공에 진입, 전란에 대한 회의 중이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국회의사당]]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돌아가는 등 육군보다 한 발 앞선 위협으로 남한 사회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예상 밖의 북한 남침에 놀란 주일미군사령부는 서둘러 원조를 결정하고 조종사들을 보내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 당시 한국 공군의 조종사는 교육 중이던 인원을 제외하고 64명이었으나, 훈련 없이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 인원은 그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이근석은 한국 공군 조종사를 대표하여 전투기 인수단장으로 김영환·[[김신]]·장성환 중령, [[강호륜]]·박희동 대위, 김성룡·정영진·이상수·장동출 중위 등 9명과 함께 일본 이타즈케 기지로 갔다. 당시 미 극동 공군이 보유한 [[P-80]](F-80) 슈팅스타같은 제트전투기들은 2차 대전 프롭기만을 몰아본 국군 조종사들에게 당장 주어지기는 무리였고, 더구나 최신예 전투기들인 만큼 막 전쟁이 일어난 신생 국가의 공군에 이 전투기들이 공여될 리도 없었다. 결국 미 극동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또다른 기종인 2차대전 프롭기 [[F-51]] 머스탱이 한국 공군에 인도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머스탱들은 일선에서 물러나 예비 물자로 비축되거나 신예 제트전투기들의 훈련시 표적을 견인하는 용도 정도로만 쓰이고 있던 상황이어서 긴급한 재정비가 필요했다. 6월 27일 일본에 도착한 이근석 대령 일행은 T-6 연습기 2대로 유지비행을 실시한 후 정비를 마친 일부 F-51 전투기로 연습비행을 하려 했으나 기상상황으로 인해 지상교육만을 받았다. 인수단은 그렇게 미국에게 10대의 [[P-51 머스탱]](F-51)을 인수하여 1950년 7월 2일에 돌아왔으며, [[7월 3일]]에[* 이날은 조종사의 날이기도 한데 다름아닌 이 첫 출격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세 차례 출격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이 한국 공군에서 최초로 [[전투기]]가 출격한 작전이었다. 대령 이근석을 [[편대장]]으로 김영환·김신·장성환 등의 편대출격([[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노량진동]] 방면)과 대위 박희동을 편대장으로 강호륜·김성룡·이상수의 편대출격([[시흥군]] 방면), 대위 박희동을 편대장으로 장동출·정영진의 편대출격(영등포동 방면)이었다. 이때의 임무는 [[제3보병사단]][[사단장|장]] [[이응준]]의 요청에 의한 대지 공격이었으며, 무장은 기총만 탑재하여 이루어 졌다. 목표지점에 비행중 충주 북방에서 이동 중인 적 기동부대에 공격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적정을 정찰한 뒤 [[대구 공군기지]]로 귀환하였다. 이 날 연료집적소 한 곳과 탄약집적소 한 곳 전소, 탱크 2대, 차량 2대를 파괴하였으며, 적병사살 약 35명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다음날인 7월 4일, 육군으로부터 시흥군 [[안양시|안양읍]](現 [[안양시]]) 지역에 남하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기갑부대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근석은 김영환·박희동·강호륜 등을 이끌고 편대를 구성하여 출격했고 이 기갑부대를 급강하 공격하던 중 경기도 시흥군 상공에서 적탄에 피격되어 추락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951년 9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공군 [[준장]]으로 1계급 특진되었다. 유해는 1957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이장되었다. [[제11전투비행단|대구 K2 기지]] 정문을 들어서면 이근석 준장의 흉상이 있으며, 매년 이 곳에서 지역 보훈청장 및 기지 내 장군 및 장병들이 참가하는 추모식을 거행한다. 또한 정문 바로 옆 면회장의 명칭도 "이근석관"이며, 1층 면회실 벽에 F-51과 다른 조종사들과 함께 새겨진 부조 작품도 존재한다.[* 이 부조 작품은 2000년대 초에 병사 6명이서 2개월간의 노력 끝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 전사에 대한 이야기 == 그의 전사에 대한 이야기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상공격 도중에 대공포에 피탄되자 그대로 조선인민군에게 충돌했다는 것인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원문은 [[http://korea815.go.kr/bbs/board.php?bo_table=story&wr_id=20|여기]]서 볼 수 있다.] 주로 공군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어 2번기와 3번기의 공격이 계속됐고, 적의 탱크들은 화염에 휩싸인 채 오도 가도 못했다. 편대의 1차 공격을 끝내고 나머지 탱크에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근석 대령은 급강하를 시작하며 로켓탄을 발사했다. > >적 탱크를 폭파하고 기수를 올리려는 순간 난사하는 적의 포탄 중 한 발이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의 엔진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기체는 붉은 화염으로 휩싸였고 도저히 수습할 길이 없었다. > >모든 것을 포기한 이근석 편대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푸른 하늘로 마지막 상승을 시도했다. 그는 지상의 적정을 살핀 후 뒤따르는 편대기에게 "3번기 도로 좌방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라고 강한 어조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 >이와 동시에 그의 불붙은 기체는 하늘에 반원을 그리며 적 탱크를 향해 돌진해갔다. 이어 지상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진동했다. 또 다른 하나는 표적고착, 즉 지상공격 도중에 고도를 회복하는데 실패하고 지상에 충돌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근석 대령이 경험이 많은 조종사였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비행은 [[Ki-27]]로 했었는데[* 버펄로에 격추될 때 탑승한 기체도 Ki-27이었다.] P-51은 Ki-27보다 훨씬 무겁고 조종특성이 다른 기체이다. 일례로 Ki-27은 지상공격시 강하고도가 1,400피트만 되어도 충분히 회복이 기능했지만 P-51은 최소한 2,000피트는 필요했다. 게다가 기종을 전환하는 일인만큼 당연히 충분한 시간을 두고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이근석 대령은 제대로 기종전환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로 출격한 상태였다.[* 이·착륙 훈련만 간신히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렬 장군은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출격을 중지시키고 미 공군 고문단에게 조종사의 훈련을 요청하게 되었다. == 기타 == [[바우트-원]]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이윤석 대령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평원군 출신 인물]][[분류:1917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실향민]][[분류:항공사고로 죽은 인물]][[분류:6.25 전쟁/사망자]][[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태극무공훈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