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아관파천)] ---- || '''이름''' ||이도철(李道徹) || || '''자''' ||성관(聖寬) || || '''호''' ||두남(斗南) || || '''본관''' ||[[전주 이씨]] || ||<|2> '''출생''' ||[[1852년]][* 행장에는 1853년(철종 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충청도]] [[제천시|제천현]][br](현 [[충청북도]] [[제천시]]) || || '''사망''' ||[[1895년]] [[12월 30일]][* 음력 11월 15일. 이틀 후 조선은 공식적으로 [[태양력]]을 도입하였다.] || || '''국적''' ||[[조선]] || || '''시호''' ||충민(忠愍)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춘생문 사건]]의 주역이다.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으로, 순조, 전계대원군, 남연군 등과 같은 항렬이다.[* 경창군의 서장남 창림군의 7대손.] == 생애 == 1852년([[철종(조선)|철종]] 3년)에 [[충청북도|충청도]] [[제천시|제천현]](현재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이덕초(李悳初)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jecheon.grandculture.net/jecheon/toc/GC03300904|#]] 제천향교 교장을 거쳐 1893년([[고종(대한제국)|고종]] 30년)에 의금부 도사로 임명받았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육군 참령으로서 훈련대 3대대 대대장 직을 맡았다. 그해 10월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하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경복궁]]에서 탈출시켜 [[주한미국공사관|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기도했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춘생문 사건]] 문서 참조.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나 실패했고, 11월 27일에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당해 12월 30일에 새남터에서 춘생문 사건을 같이 기획했던 동지 임최수와 함께 처형당했다. 향년 43세였다. == 사망 이후 == 이도철이 처형당하고 1달이 조금 지난 뒤인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마침내 [[경복궁]]을 탈출하여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피신했다.]] 이로써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세워졌으며 이도철은 복권되었다. 그 뒤 시호 '충민(忠愍)'과 군부 협판 직을 추증받았으며 가족들은 지원금을 받았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034|#]] 1901년([[광무]] 5년)에는 육군법원장 백성기의 건의로 같이 사형당했던 임최수와 함께 [[장충단공원|장충단사]]에 배향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034|#]] 묘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에 있다. == 여담 == * 《충민공초》, 《충민공부군행장초》, 도검 등 이도철의 유품을 현재까지 후손들이 소장한다고 한다.[[http://jecheon.grandculture.net/jecheon/toc/GC03300904|#]] * 1959년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서는 배우 [[박노식(1930)|박노식]]이 연기했다. [[분류:조선의 군인]][[분류:제천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경창군파]][[분류:1852년 출생]][[분류:1895년 사망]][[분류:교수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