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이무영(동명이인))]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004071536515021.jpg|width=150]] 李無影 [[1908년]] ~ [[1960년]] [[4월 21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소설가. 아명은 이용구(李龍九), 본명은 이갑용(李甲龍)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272|#]] == 활동 내역 == 1908년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석인2리 오리골마을[[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623|#]]에서 이덕여(李德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 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로 이주, 이 곳에서 성장했다. 사립 용명(龍明)학교,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세이조(成城)중학교를 다녔으나 모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다. 1926년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이후 교사,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1939년 [[경기도]] 시흥에 정착한 후에는 농민, 흙의 노예 등과 같은 농민 소설을 집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귀농]]을 주제로 한 "제1과 제1장"이 있다. [[구인회]]의 발족 멤버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 일간신문에 친일 논설을 발표하는 등,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관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 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일본어 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해방 후에는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6.25 전쟁]] 때에는 [[염상섭]], 윤백남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의 [[정훈]]장교로 복무, 1955년에 대령으로 예편했다. 1960년 4월 21일 [[뇌일혈]]로 숨졌다.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자]][[분류:음성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경주 이씨]][[분류:신경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장교 출신]][[분류:6.25 전쟁/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