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파일:leebeomseon.jpg|width=100%]]|| || 이름 ||이범선(李範宣) || || 호 ||학촌(鶴村) || || 본관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17대손 범(範) 항렬.[[https://madangca.tistory.com/entry/%EC%86%8C%EC%84%A4%EA%B0%80-%ED%95%99%EC%B4%8C-%EC%9D%B4%EB%B2%94%EC%84%A0-%EC%A0%84%EC%A3%BC%EC%9D%B4%EC%94%A8|묘비에 전주 이씨라고 새겨져 있다]].] || ||<|2> 출생 ||[[1920년]] [[12월 30일]] || ||[[평안남도]] [[안주시|안주군]] [[신안주|신안주면]] 운학리[*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19326|#]]][br](현 [[평안남도]] [[안주시]] 운학리) || ||<|2> 사망 ||[[1982년]] [[3월 13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자택 || || 학력 ||신안주 청강보통학교 {{{-2 (졸업)}}}[br]진남포공립상공학교 {{{-2 (졸업)}}}[br][[동국대학교]] 전문부 {{{-2 ([[졸업]])}}}[br][[동국대학교]] {{{-2 ([[국어국문학]] / [[학사]])}}} || || 첫 작품 ||암표 (1955) || || 마지막 작품 ||미친 녀석 (1981) || ||<-5> '''제4회 [[현대문학상]] 수상''' || || [[박경리]][br](1958) || → || '''이범선[br]갈매기[br]사망보류[br](1959)''' || → || [[서기원]][br](1960) || ||<-5> '''제5회 [[동인문학상]] 수상''' || || [[손창섭]][br](1959) || → || '''이범선, [[서기원]][br]오발탄[br]이 성숙한 밤의 포옹[br](1960)''' || → || [[남정현]][* [[분지 필화사건]]의 그 소설가다.][br](1961) || [목차] [clearfix] == 인물 소개 == [[선우휘]], [[오상원]]과 함께 [[대한민국]]의 전후([[6.25 전쟁]] 이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평안도]] 출생의 [[소설가]]. 호는 학촌(鶴村). 1920년 12월 30일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학리(현 안주시 운학리)에서 아버지 이계하(李癸夏)와 어머니 유심건(劉心健) 사이의 5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계하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80501033339179001|대지주로]], 이범선의 집안은 굉장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1933년 고향의 청강(淸江)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평양시|평양부]]에서 당대의 엘리트인 은행원으로 근무했으며, [[만주]]에 가서 [[사무직]] 계통의 회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그는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1943년 고향의 신안주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10월 평안남도 [[중화군]] 풍덕면 풍덕리 출신의 3세 연하인 홍순보(洪順輔)와 결혼했다. 11월에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당시 처남이 간부로 있던 평안남도 [[개천시|개천군]] 북면 봉천리 소재 풍천(鳳泉) 탄광 경리부로 자리를 옮겨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표작 [[학마을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가 집필한 대부분의 작품들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최후반기에서 6.25 전쟁 발발 전후 시기로 표현된다. [[8.15 광복]] 후 귀향했다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의 공산당이 지주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1946년 홀로 월남하여 [[미군정청]] [[대한민국 국방부|통위부]], 금강전구회사 회계과 등지에서 근무하는 한편, [[동국대학교]] 전문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 이듬해인 1947년에는 부인 홍순보 또한 월남하여 서울에 새 터전을 꾸리게 되었다. 1948년부터는 [[연희대학교]] 교무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부인과 함께 연희대학교 사택에 거주했다.[[https://m.blog.naver.com/kwank99/30021718974|#]] 1949년 동국대학교 전문부 졸업 후에는 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출신의 실향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가족이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게되면서 소설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게 된다. 1951년 [[1.4 후퇴]]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 [[부민동|대안동]](현 [[부산광역시]] [[서구(부산)|서구]] [[부민동]])으로 피난하여 동네에 있던 교회에서 살았다. 그해 가을부터는 [[백낙준]]의 소개로 [[거제고등학교]] 교사에 부임하게 되어 가족들이 [[거제도]]로 이주했다. 이범선은 거제고등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다. 1952년 동국대학교 본과를 졸업했고,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성북구]] [[안암동]], [[경기도]] [[시흥군]] [[안양동|안양읍]](현 [[경기도]] [[안양시]]) 등에서 셋방을 얻어 살았다. 1955년부터는 [[대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때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해 『현대문학』 4월호에 단편 「암표」, 12월호에 단편 「일요일」을 각각 투고했다가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본격적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1959년 대광고등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잠시 교무주임으로 근무했으나 이듬해인 1960년 사임했다. 1961년에는 [[휘문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강사로 출강했으며, 196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1973년 [[부교수]], 1977년에는 [[교수]]로 승진했고, 1981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82년부터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문리과대학장으로 근무할 예정이었으나, 2월 28일 자택에서 [[뇌일혈]]·[[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줄곧 [[경희의료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던 중 결국 1982년 3월 13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자택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03130032920203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3-13&officeId=00032&pageNo=2&printNo=11217&publishType=00020|별세했다]]. [[김진규(배우)|김진규]], [[최무룡]] 주연으로 《[[오발탄]]》이 영화화되었고 《동트는 하늘밑에서》는 [[클로버 문고]]에서 [[신영식(만화가)|신영식]] 그림으로 〈무적의 독수리 소대〉라는 제목으로 만화화되었다. 《[[학마을 사람들]]》도 TV 문학관에서 극화되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20년 [[학촌 이범선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작품 세계 == === 비극 === 이범선 작품을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일 것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꿈도 희망도 없으며'''[* 심지어 비현실적인 부조리극 [[고장난 문]]의 경우 조차도 일단 누구 하나 죽고 누구 하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며 끝이 난다(…). --[[우로부치 겐|이 사람]]의 시대를 앞서간 스승님 버전인가--]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더욱이 이범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인물들의 대다수가 소시민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비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학문사에서 출간된 이범선 소설론에서도 한 챕터를 들여 '''이범선 소설에 나타난 피해의식 연구'''를 분석하고 있을 정도니... 요약하자면 이범선의 작품들은 작품따라 현시창의 강도가 약간씩 다를 뿐,[* 대중적으로 꽤 알려진 오발탄도 엄청 현시창급이나,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약한 정도라는 평이 있다는게 그 예시.] 모든 작품이 한결같이 꿈도 희망도 없는 비극 투성이라는 것. 아마 그의 전쟁시기~전후시기를 겪어본 경험이 이런 비극이 난무하는 작품관에 영향을 준듯하다.[* 이범선의 출생시기는 일제강점기 시대였으니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였던 조선 사람들이 겪었던 암울한 사회상과 해방 후 혼란기, 혼란기 이후 들이닥친 6.25 전쟁, 6.25 전쟁 이후 남한 사회에 전쟁의 여파가 남긴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을 '''이범선은 일생동안 생생하게 겪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망 시기는 1980년대였으므로, 아마 [[이승만]] ~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났던 온갖 사단들도 다 봐야했을거다. --괜히 꿈도 희망도 없는 작품만 쓰신게 아니다--] === 반공 === >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편에서 먼저 살모사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한다. >기어이 그를 찾아내어서 그 정체를 밝혀야겠다. >멱살을 쥐고 따져야겠다. >“너는 정말 살모사인가. 너는 정말 살모사인가!”' - [[살모사]] 마지막 부분. 단편 [[살모사]]에서, 자기 친부, 친모도 죽게 만든 좌익 청년 살모사에게 두려움과 증오를 쏟아붓는 장면이다. 작가의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사실 이범선은 당대의 반공 소설가들에 비해서는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편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창으로 전쟁을 본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반공 성향보다는 전후의 비참한 생활과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소설의 메인 소재로 삼았다. === 반기독교 === >'아버지의 말대로 나의 딸애가 다리를 절며 애들의 놀림감이 되고는 뒤뜰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개미집을 들여다보며 소리 없이 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라면 당장에 두 손바닥과 발등에 굵다란 대못을 땅땅 때려 박는 그런 참혹보다 오히려 몇 배나 더한 그 잔인한 짓의 대가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뜻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다.' - [[피해자]] 中 [[피해자]], [[천당 간 사나이]] 등 작품에서 반기독교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특히 중편 피해자의 경우 문단 하나하나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서려있다. == 작품목록 == * 1955년 [[암표]] * 1957년 [[사망보류]] * 1958년 [[학마을 사람들]], [[갈매기]] * 1959년 [[오발탄]] * 1963년 [[피해자]] * 1963년 [[자살당한 개]] * 1964년 [[살모사]] * 1970년 [[청대문집 개]] * 1972년 [[표구된 휴지]] * 1976년 [[천당 간 사나이]] * 1977년 [[고장난 문]] * 몸 전체로 - 전쟁으로 가족들을 굶겼고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던 한 교사가 마약장수인 동업자의 죽음으로, 그 돈을 다 날름하고 환도령이 내리기전에 서울가서 집을 싸게 산다. 그리고 자기 아들은 강하게 만들려고 권투를 가르친다. * 동트는 하늘 밑에서 - 한국전 당시 적진에 고립된 국군부대와 반공 유격대, 그리고 피난민들의 탈출기로 대단한 리얼리즘 소설이다. 북한의 민간인 학살, 보복학살, 남편이 살해된후 미쳐서 자기 애를 죽이는 빨갱이 부녀자, 길에서 XX등 ~~그야 막장~~`꽤 리얼하다.. 특히 성경 찢어서 불피우기는 정말.... * 두메의 어벙이 - 우화의 형식을 빌린 동화. 참새가 서울가다 향수병을 못이겨서 돌아오는데 얼어죽는다. 실향민인 저자 본인 입장을 반영했다. == 관련 문서 == * [[작가/목록]] [[분류:이범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