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 '''{{{+1 이석채}}}'''[br]'''李錫埰'''}}}}}} || || '''이명''' ||박탁(朴鐸) || || '''자''' ||경필(卿弼) || || '''본관''' ||[[여주 이씨]][* 여강경주파(驪江慶州派)-수졸당파(守拙堂派) 24세 '''석(錫)''' 광(光) 근(根) 현(鉉) 항렬.] || ||<|2> '''출생''' ||[[1892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0875|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기준. 여주(여강)이씨족보 권2 1279쪽에는 189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5월 26일]] || ||[[경상도]] [[경주부]] [[안강읍|안강현]] 양좌동[br]{{{-2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25번지)}}}[*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한구(1870년 9월)|이한구]]·[[이인석(독립운동가)|이인석]], [[정치인]] [[이원준(정치인)|이원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432731&docid=0010866879&mngno=BJCA241872&type=12&want=1&arch_tp_id=12&formType=old&rtURL=%2facreage%2flistOldnameSearch.do%3fpage%3d1%5edepth1%3d%25EA%25B2%25BD%25EC%2583%2581%25EB%25B6%2581%25EB%258F%2584%5edepth2%3d%25EA%25B2%25BD%25EC%25A3%25BC%25EA%25B5%25B0%5edepth3%3d%25EA%25B0%2595%25EB%258F%2599%25EB%25A9%25B4%5edepth4%3d%25EC%2596%2591%25EB%258F%2599%25EB%25A6%25AC%5earch_tp_id%3d12%5eserviceCode%3d1-1-3|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3년 당시 양동리 125번지는 이석채의 아버지 이상구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 || '''사망''' ||[[1948년]] [[3월 16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0875|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기준. 여주(여강)이씨족보 권2 1279쪽에는 1947년 11월 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양산)|원동면]] 화제리 임경대 부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석채는 [[1892년]] [[5월 2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읍|안강현]] 양좌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25번지)에서 아버지 이상구(李庠久, 1875. 4. 14 ~ 1931. 10. 3)와 어머니 [[밀양 박씨]](1873. 1. 2 ~ 1942. 2. 3)[* 박기우(朴起羽)의 딸이다.]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석채는 [[1919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부산)|온천동]])의 김천여관에서 동래면 [[칠산동]](현 동래구 칠산동)에 사는 이정약(李丁若)에게 벼 100석을 1석당 20원으로 하여 팔겠다며 열흘 뒤에 벼를 넘겨 주겠다고 했다. 그 뒤 [[12월 31일]] 김천여관에서 돈 1,600원을 받았고, 이듬해 [[1월 8일]]에는 부산여관에서 돈 400원을 받는 등 총 2,000원을 받아냈다. 이석채는 이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이튿날인 [[1920년]] [[1월 9일]],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를 출발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했고, [[1월 17일]]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유하현(柳河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에 도착했다.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1,000원을 임시정부 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 뒤 그 또한 임시정부의 외무원에 선임되었고, 조선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 요원을 모집, 권유하기 위해 귀국했다. [[1920년]] 2월 4, 5일경에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로 가서 [[기선(선박)|기선]]을 타고 [[강원도]] [[강릉군]] [[주문진읍|신리면]](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항]]에 도착하였다. 이후 며칠간 주변에 머물다가 박탁(朴鐸)이라는 가명으로 강릉군 덕방면 두산리(현 강릉시 두산동)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가담하도록 권유했고, 2월 19일에는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현 [[삼척시]] 읍상동)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을 만나 임시정부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임시정부 요원으로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01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335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0년 6월 8일 형사사건부]]에는 1920년 6월 8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17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481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0년 4월 20일 형사사건부]]와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01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335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0년 6월 8일 형사사건부]] 모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1심이 열린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죄'[[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19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5345&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라고도 한다]].] 위반 및 [[사기죄|사기]],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17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481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1920년 4월 20일 형사사건부]]에는 6년 미만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52&evntId=0034989184&evntdowngbn=Y&indpnId=000002036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3월 16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여담 == * 부인 [[영양 남씨]](1892. 12. 23 ~ 1968. 11. 19)[* 남조와(南朝洼)의 딸이다.]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 때문에 호적상으로도 후손이 없다. 다만, 족보상으로는 첫째 남동생 이석기(李錫圻, 1901. 6. 16 ~ ?)의 장남 이원준(李源準, 1933. 3. 20 ~ )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 * 훈장증 등 이석채의 유품은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강동리 양동민속마을 강학당에 소장되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주 이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