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관리]][[분류:1594년 출생]][[분류:1660년 사망]][[분류:연안 이씨]][[분류:공조판서]][[분류:형조판서]][[분류:호조판서]] [include(틀:조선 정사공신(인조))]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시방.jpg|width=100%]]}}} || |||| {{{+2 이시방[br]李時昉}}} || || '''출생''' || [[1594년]]([[선조(조선)|선조]] 27) || || '''사망''' || [[1660년]]([[현종(조선)|현종]] 1)[* 형인 [[이시백]]과 같은 해에 죽었다.] || || '''자''' || 계명(季明) || || '''호''' || 서봉(西峯) || || '''본관''' || [[연안 이씨]][* 소부감판사공파.]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의 주역 [[이귀]]의 아들로 [[이시백]]의 동생이다. 배위는 이수검의 딸 [[청주 이씨]]다. == 생애 == 1594년 연평부원군 이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귀가 반정에 참여할 당시에는 이시방은 유생이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이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사실 반정 당시 유생이었던 이시방이 아버지 이귀의 권유로 인해 가담했을 정도면 이귀는 실패했을지도 모르는 반정에 자신의 형인 이자에게 [[입양]]된 차남 이시담을 제외한 온 [[가족]]을 가담시켜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도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경계를 엄히 했는데 [[인조]]가 도착한 뒤에는 8도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에 유배되었다가 1640년 사면되어 [[제주특별자치도|제주]]목사로 나갔다. 제주목사 역임 당시 [[광해군]]이 죽자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여 사변을 잘 처리하기도 했는데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에도 광해군 사후 처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후 병으로 직책을 그만두었으나 1642년 겨울에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며 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본의아닌 일로 파직되었고 1644년 다시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마침 심기원의 역변이 일어났는데 형 이시백과 함께 관련이 있었다는 흉서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 1645년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647년 병조참판을 거쳐 가선대부가 되었고 1648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인조가 죽자 산릉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고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도록 했으며 그 뒤 [[호조판서]]가 되어 폐정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당시 자신의 누이인 예순비구니가 김자점의 아우인 김자겸과 결혼하여 김자점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59년 [[현종(조선)|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으나 곧 병으로 죽었는데 이후 [[영의정]]으로 추봉되었고 연성부원군에 증직되었다. == 기타 == * 독립유공자 이설은 이시방의 직계 9대 봉사손(奉祀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