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81년 출생]][[분류:1660년 사망]][[분류:연안군 출신 인물]][[분류:연안 이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서인]]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인조-경종))] || '''{{{#f0ad73 이시백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인조-경종))] ---- [include(틀:조선 정사공신(인조))] ---- [include(틀:서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영의정}}}]][br]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충익공(忠翼公)[br]{{{+1 이시백}}}[br]李時白'''}}}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시백 초상.jpg|width=100%]]}}} || || '''출생''' ||[[1581년]] [[11월 15일]][* [[율리우스력]] [[11월 5일]].][br](음력 [[선조(조선)|선조]] 14년 10월 10일)|| || '''사망''' ||[[1660년]] [[6월 9일]] (향년 78세)[br](음력 [[현종(조선)|현종]] 1년 5월 2일)|| || '''[[봉호|{{{#fff 봉호}}}]]'''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 '''[[시호|{{{#fff 시호}}}]]''' ||충익(忠翼)|| || '''[[본관|{{{#fff 본관}}}]]''' ||[[연안 이씨]]|| || '''[[자(이름)|{{{#fff 자}}}]]''' ||돈시(敦詩)|| || '''[[아호|{{{#fff 호}}}]]''' ||조암(釣巖)|| || '''부모''' ||부친 - [[이귀]][br]모친 - [[인동 장씨]] 장민(張旻)의 딸|| || '''형제자매''' ||'''5남 4녀 중 장남'''[br]남동생 - 이시담(李時聃, {{{-3 1584 ~ 1665}}})[br]남동생 - [[이시방]][br]여동생 - 변경윤의 처, [[경주 김씨]] 김경여(金慶餘)의 처, 김설의 처, 이여순(李女順)[br]이복 형제 - 이시응(李時應), 이시형(李時衡)|| || '''부인''' ||[[남원 윤씨]] 윤지숙(尹止淑, {{{-3 1579 ~ ?}}})[* [[영산군]]의 외고손녀.[[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53906|#]]]|| || '''자녀''' ||'''슬하 3남 1녀'''[br]장남 - 이흔(李忻, {{{-3 1598 ~ 1662}}})[br]차남 - 이한(李憪, {{{-3 1601 ~ ?}}})[br]3남 - 이열(李悅, {{{-3 1613 ~ ?}}}[br]장녀 - [[풍양 조씨]] 조내양(趙來陽)의 처({{{-3 1617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문신.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이귀]]의 아들이며, [[이시방]]의 형이다. == 생애 == 젊었을 때에는 [[이항복]]의 문하에 있으면서 [[최명길(조선)|최명길]], [[장유(조선)|장유]] 등과 친구가 되었다. [[광해군]]이 [[인목왕후|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하자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모의를 하였다. 인조반정 때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을 받았고, [[인조]] 2년(1624년)에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효종 때에 연양부원군으로 높여진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모병협수사(募兵協守使)가 되어 이천 일대에서 향병을 모집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5_014|#]] [[병자호란]] 때에 수어사로 남한산성의 서쪽 부분을 지키는데 [[청나라|후금]]의 군사들이 밤 중에 야습을 가하자 갑옷도 입지 않고 병졸들보다 앞서 화살을 쏘다 적의 화살을 두 발이나 맞았으나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이를 숨기고 끝까지 지휘했다. 소란과 동요가 심했던 다른 쪽 성들과는 달리 이시백이 지휘한 서쪽 부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시백도 패배 경험이 있는데, 북문에서는 군사 300을 이끌다 청나라군에게 모두 몰살당한 일도 있다. --물론 [[인조]]가 독촉을 했긴 했지만...-- [* 이 일 때문에 남한산성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가 죽은 후 [[효종(조선)|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의논할 때 '옛 역사를 따르면 [[태자]]가 없으면 태손으로 잇게 하는 건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니 권도를 버리고 상도를 행하세요'라는 홍서봉의 의견에 동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2306102_001|#]] 효종 1년(1650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김육]], 동생인 이시방과 함께 적극적으로 [[대동법]]의 시행에 앞장섰다. [[현종(조선)|현종]] 시절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에서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시열]] 등과 함께 [[장렬왕후|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1년복)으로 결정했는데, [[윤휴]]가 3년복을 주장하자 이시백이 정태화에게 서신을 보내 의견을 물어 보니, 정태화가 국제를 근거로 하고 송시열은 대명률에 따라 기년복을 주장하여 그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자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한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라며 대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냐고 다시 물으며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며 [[이귀|부친]]의 공을 자신은 잊지 못한다고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부탁하자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 ~~ 이후 효종이 즉위하자 마자 우의정이 되었다.~~ 현종 1년(1660년) 4월에 병이 위중해져 왕이 약물을 내렸으나 5월에 사망했다. 현종 15년(1674년)에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평가 == 청렴하고 충의롭고 근신한 절의는 당대의 재상들 중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생 이시방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이시방은 [[김육]]이 대동법 실시에 실무를 담당할 만한 인재 중 한 명으로 추천한 바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105002_004|#]] [[현종(조선)|현종]] 개수 실록에서도 벼슬살이 38년 동안 청렴하고 삼가고 검소한 것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는 선비로서 받을 수 있는 극찬을 받는다. 또한 인척[* 이시백의 여동생이 김자점의 동생인 김자겸의 부인이고 이시백의 외손자인 김세창은 김자점의 손자이다.]인 [[김자점]]의 역모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배려를 받았다는 얘기를 적으면서 그가 임금에게도 많은 총애를 받았다는 얘기까지 곁들여져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105003_003|#]] == 대중매체 == *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는 [[주인공]]인 박씨 부인의 남편인데 이시백이 [[모티브]]이다. 아버지가 [[이귀]]가 아닌 이득춘이라는 인물로 나오며 동시에 윤씨였던 부인 역시 박씨로 나오는 등의 차이가 있으나 이건 이 이야기가 픽션이라는 장치로 보면 된다. 인성이 개차반이라 자기 아내를 못 생겼다는 이유로 매우 박대하고 구박한다.[* 그런데 허물을 벗고 [[미녀]]로 둔갑하니까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 1976년 [[TBC]] 드라마 <별당아씨>에서는 배우 [[김세윤]]이 연기했다. 주인공인 박씨 부인의 남편이다. * 웹소설 <조선후궁실록 : 호란기연>에서는 [[유응부]]의 아들이자 여주인공 이화진의 연인이었던 유정운의 환생으로 나온다. 마지막에는 이화진의 외할아버지 영찬의 희생으로 죽음을 피하고 이화진과 재회하지만 상철의 희생으로 죽음을 피했던 소연도 결국 경민을 낳고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걸 생각하면 시백 또한...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이승효]]가 연기했다. *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영화)|남한산성]]>에서는 배우 [[박희순]]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문관임에도 지휘관이 무쌍난무하는 [[클리셰]] 때문에 작중에서 조선 무쌍을 찍는다. 어느 정도냐면 후반부에 무너진 성벽을 타고 [[청나라]]군이 밀고 오자 [[백성]]들을 징병한 [[조선]]군들은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하는데 이시백 혼자 무너진 성벽 틈을 칼춤 추며 막으며 혼자 수십 명을 썰어버린다. 다만,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활을 쏜 기록이 있기에 아예 판타지적인 [[고증오류]]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으며 영화에서는 아예 고증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무관으로 등장하기에 일종의 영화적 허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