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177, #003399 20%, #003399 80%, #001177)"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해군작전사령관)] [include(틀:해군사관학교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177, #003399 20%, #003399 80%, #001177)"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FFF 대한민국 제4대 해군참모총장}}}]][br]{{{#FFF {{{+1 이용운}}}[br]李龍雲 | Lee Yong-woo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4대 이용운 제독.png|width=100%]]}}} || || '''출생''' ||[[1914년]] || ||<|2> '''사망''' ||[[1987년]] [[10월 19일]] (향년 73세) || ||[[미국]] [[로스엔젤레스]] || || '''학력''' ||도쿄고등상선학교 {{{-2 (졸업)}}} || ||<-2> '''군사 경력''' || || '''임관''' ||[[해군사관후보생|특교대]] 6차 || ||<|4> '''복무''' ||[[일본제국 해군]] || ||[[1935년]] ~ [[1945년]] || ||[[대한민국 해군]] || ||[[1949년]] ~ [[1960년]] || || '''최종 계급''' ||[[소좌]] {{{-2 (일본제국 해군)}}}[br][[중장]] {{{-2 (대한민국 해군)}}} || || '''최종 보직'''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해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해군사관학교]] 교장, [[해군작전사령관|한국함대사령관]]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군인. 본관은 [[이(성씨)|안악]](安岳). 15대 국회의원이였던 [[이건개]]가 동생 이용문의 아들이고, 이용운의 조카가 된다. == 생애 == 평양 출생으로, 1934년 [[도쿄해양대학|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学校)를 졸업 후, [[요코스카]] 해군포술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연합함대]] 소속 [[전함]] 항해사, [[소해정]] 항해장, [[구잠정]] 정장, 특설운송선 산코마루(三江丸)[* 1944년 2월 16일 미군 공습으로 [[비스마르크 제도]] 뉴하노버 섬 근해에서 침몰[[http://www.tokusetsukansen.jpn.org/J/326/326_003.htm|출처]]. 조카 이건개에 따르면 무인도에서 생활하다 극적으로 생환했다고 한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03100038|출처]]] 선장 등을 맡았고, [[소좌]]까지 진급했다.[* 이용운 외 일본해군 출신 한국해군 장교는 강기천, [[현시학]], 차수갑, 박수옥, 윤석근, 정창룡 등이 있다. 이용운이 일본해군 소령 계급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의 [[양자(가족)|양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대한민국 해군 창군사', 해군역사기록관리단)] 해방 후 1949년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임명됐고, 195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장(1953년~1955년), [[해군작전사령관|한국함대사령관]](1956년~1959년)을 거쳐 [[정긍모]]에 이어 1959년에 [[중장]]으로 해군참모총장이 됐고, 1960년 부정축재 의혹으로 사임했다. 후임자는 [[이성호(해군)|이성호]] 제독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당했다가 해외로 망명했다. 1973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 망명해있던 당시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창설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75년 1월 24일자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저널'에 이용운 명의의 "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수기"(朴大統領を糾弾する手記)가 게재됐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396622|#]] 이후 1978년 6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 기타 == * 동생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255|이용문(李龍文)]]은 [[대한민국 육군]] 소속으로 1948년에 육군의 첫 기갑연대장을 지냈다. 당시 한국의 특성상 기병부대가 필요하다여겨 대한학생마술연맹의 승마부원들을 설득해 1949년에 제2기병대대를 창설했다. 1952년에는 수도사단장(현재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에 취임했고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53년에 37세로 순국했다.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친분이 깊어 유족들을 박정희가 도와줬다고 한다. >이용문 장군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본 정보국장 재임 시 남로당에 연루돼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이용문이 작전교육국장을 할 때 박정희가 차장으로 보좌했으며 박이 존경한 유일한 선배군인이었다 한다. 그 인연 때문에 이용문 장군의 아들 [[이건개]]는 30대 젊은 나이로 서울지검장과 치안국장,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박정희의 이용운에 대한 배신감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http://www.koreatimes.com/article/1232927|출처]] == 관련 문서 == * [[대한민국 국군/인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용운, version=43)] [[분류:1914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안악 이씨]][[분류:1987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