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 [[파일:external/www.dbneedle.com/ecb88a1a_%C0%CC%C1%A6%B8%B6.jpg]] {{{+3 李濟馬}}} [[1837년]](1838년?) [[4월 23일]][* [[음력]] [[3월 19일]].] ~ [[1900년]] [[8월 11일]] (향년 63세)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와 [[구한말]]의 [[무인]]이자 [[의학]]자.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안원대군파 20세 섭(燮) 항렬.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이섭운(李燮雲)으로 등재돼 있다.][* [[태조(조선)|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둘째아들 안원대군 이진의 [[후손]]이다. 같은 전주 이씨이기는 하지만 조상에 진짜 왕(추존왕 말고)이 하나도 없어 엄격하게 보면 왕손도 아니었다. 조선은 대군의 4세손, 군의 3세손, [[공주]]와 [[옹주]]와 [[결혼]]한 [[부마]]와 그 자녀들까지를 [[왕족]]으로 인정해 작위를 하사했으며 군-령-부령-정-도정-수-부수 같은 작위를 수여하였다.]로 [[왕실]]의 종친이지만 서자다. 호는 동무(東武).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제마는 '''[[태양인]]'''이었기 때문에 [[태양인 이제마]]라는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 생애 == 1837년 4월 23일 [[함경도]] [[함흥부]] 주동사 회상리 둔지(現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일·이·삼·사동)에서 아버지 이반오(李攀五, 1812. 1. 7 ~ 1849. 4. 27)[* 자는 사교(士敎).]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오는 1831년([[순조]] 31) 식년 [[생원|생원시]]와 [[진사|진사시]]에 모두 3등으로 입격했던 양반[* 생원시는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31_030438|3등 49위]], 진사시는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31_030552|3등 63위]]]이었으나 어머니 경주 김씨가 아버지 이반오의 첫째 부인 [[전(성씨)|전주 전씨]](全州 全氏, 1811. 11. 9 ~ 1835. 5. 21)[* 전기면(全基勉)의 딸이다.]와 사별한 뒤 잠시 만나 사통(私通)했던 여성이었기에 이제마는 [[서자]]였다. 야사에 따르면 어머니 경주 김씨는 함흥부에 있던 어느 작은 마을의 주막집 딸이었는데, [[백치]]였다고 한다. 제마(濟馬)라는 이름은 그의 조부 이충원(李忠源, 1777. 12. 9 ~ 1849. 12. 23)이 꿈에 어떤 이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준마 한 필을 준 [[태몽]]을 꾸었다 하여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출생 이후 함흥부 사촌(沙村)에 있던 조부댁에 살다가 함흥부 원천사 축상리 원곡(現 함경남도 [[신흥군]] 축상리)으로 이주해 아버지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 시기 [[전주 김씨]](1816. 10. 28 ~ ?. 1. 24)[* 김치형(金致珩)의 딸이다.], 경주 김씨(1827. 9. 11 ~ 1895. 7. 29)[* 김용빈(金用贇)의 딸이다.] 등의 부인을 차례로 들였고, 남동생 이섭증(李燮曾, 1839. 5. 24 ~ 1875. 6. 4), 이섭로(李燮魯, 1842 ~ ?)와 여동생 두 명이 태어났다. 그리고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이른바 '북도문장(北道文章)'으로 알려져 있던 큰아버지 이반린(李攀鱗, 1779. 10. 10 ~ 1853. 2. 14)[* 1843년(헌종 9) [[https://sjw.history.go.kr/id/SJW-I09120260-03000|순릉 참봉]]([[순릉|純陵]][[참봉|參奉]]), 1846년 [[https://sjw.history.go.kr/id/SJW-I12120230-00800|의릉 봉사]]([[의릉|義陵]]奉事), 1849년(철종 즉위년) [[https://sjw.history.go.kr/id/SJW-J00070250-03500|덕릉 직장]]([[덕릉|德陵]]直長) 등을 역임했다.]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했다. 그러나 13세 되던 1849년 아버지와 조부가 별세했고, 이어 1852년에는 조모 [[의령 남씨]](1779. 11. 7 ~ 1852. 4. 16)[* 남광협(南光協)의 딸이다.]가, 1853년에는 한문을 가르쳐 주던 큰아버지마저 별세했다. 또한 서자였던 출생 탓에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선원속보(璿源續譜)》 등에는 남동생 이섭증과 이섭로 다음으로 세 번째 차례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10대에 함흥부에서 치러진 향시에서 장원한 이후 줄곧 방황해 36세까지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 [[한반도]] 북부 일대는 물론 [[만주]]나 [[연해주]]까지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방황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36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50세에 진해현감(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일대로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는 다른 곳)이 되었으며 2년 10개월을 진해현감으로 지냈다. 이후 1896년에는 [[노익장|60세가 다 된 나이]]에 최문환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고원군]]수로 임명받았으며 1897년 [[사직]]하였다. 이후 [[의술]]에 전념하여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후 향년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21세기|100년이 지나면]] 사상의학이 세상을 풍미할 것이다"였다. 저서로는 <격치고>, <동의수세보원> 등이 있다. 30세 전후에 객사에서 발견한 [[한석지]]의 저서인 <명선록>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 계열의 학풍을 띤다. 대표적인 유의([[유학자]] 의사)로서 [[유교]]적 세계관과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토대로 사상의학의 기틀을 수립하였기에 [[한의학]]계에서는 중요한 의사로 보고 있다. 다만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이론이 철저히 [[성리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게 흠이다. 그 중요한 위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의학을 조선에 들여와 향약을 분류하던 정도에서 그치던 기존 한의학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이론을 냈다는 것 정도에서 기인한다. 야사에는 [[환자]]들의 체질을 모를 경우 선호하는 [[음식]]을 알아보거나 같이 지내며 확인하는 일도 있다. 한 번은 체질을 몰라 고민하다가 장작더미를 옮겨보도록 하고 여러번 옮기게 한 뒤에야 비로소 [[소음인]]임을 파악한 적도 있다. == 기타 == 아래 대중매체란에 하술되어 있지만,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으로도 활동하였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의외로 신식군대에 몸을 담았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692318535|#]] == 대중매체에서 == * [[대체역사소설]]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본래 무과에 급제했다는 점을 반영해 무인으로 [[신미양요|신미전쟁]]에 참전한다. 현대에서 넘어간 [[민국인]]들은 이제마가 사상의학의 창시자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보니 이제마가 [[기침]]만 해도 "그러게 자네는 의원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하고 이제마는 속으로 '민국인들은 다 좋은데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한다. 평생 무인되기를 꿈꾼 사람더러 의원이 되라니…'하며 살짝 투덜거린다. [[서양]] [[연합군]]에 착검 돌격을 벌여 지휘관 다수가 전사하는 격전 중에 [[어깨]] 부상을 입었으나 [[출혈]]이 다소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운신 가능한 최선임 장교로 권철상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했다. * 1986년 KBS 드라마 [[선구자]]에서는 [[임혁]]이 주인공으로서 이제마 역을 맡았다. * 2002년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에서는 [[최수종]]이 주인공으로서 이제마 역을 맡았다. == 관련 항목 == * [[동의수세보원]] * [[사상의학]] [각주] [[분류:조선의 양명학자]][[분류:한의사]][[분류:서출]][[분류:함흥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안원대군파]][[분류:1837년 출생]][[분류:190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