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rokps.or.kr/213.jpg|width=150]] 李鍾郁 [[1884년]] [[1월 13일]] ~ [[1969년]] [[11월 3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종교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78|#]], [[종교]]는 [[불교]]로 법호는 지암(智庵). 아명은 이학순(李學順), 속명은 이학순(李學順)이며, 이명은 이윤응(李潤應)이다. == 생애 == 1884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아버지 이영록(李永록)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3&evntId=0034988193&evntdowngbn=Y&indpnId=000002553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원적지는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935|#]][[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664|@]] 태어난 지 13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김경윤(金敬允) 선생을 양부로 삼았다. 그러나 1889년에 양부와 양모, 1890년에 양조모까지 별세하여 생가로 돌아왔다. 13세에 [[월정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월정사 승려 시절인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때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지내면서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서 [[의친왕]] 망명 사건 계획이나 공작등 했다던가...]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 국내로 귀국해서 [[스님|승려]]로 활동하며 월정사 [[주지]]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창씨개명]]도 하여 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쇼이쿠(廣田鍾郁)이다. [[8.15 광복]]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의 단체에 몸담았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회(1945년)|국민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이 모여 만든 정치 세력으로 미군정에 대한 충성과 민간인 학살 등의 전과가 있다.] 후보로 고향인 평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국민당]] [[황호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돌아왔다. 1969년에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1993년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결국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이 취소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제2대 국회의원/강원도)]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종욱, version=20)] [[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일제강점기의 승려]][[분류:평창군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분류:1884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동국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