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920년 출생]][[분류:966년 사망]][[분류:창즈시 출신 인물]][[분류:송나라의 외척]]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李處耘 (920년 ~ 966년)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장수로 자는 정원(正元)이다. 노주(潞州) 상당현(上黨縣) 출신. == 생애 == === 초기 생애 === 920년 이조(李肇)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진]] 말에 이처운은 형인 이처주(李處疇)를 따라 수도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장언택이 성문을 돌파하고 입성하여 사졸들을 풀어 약탈을 저질렀다. 이처운은 홀로 고향을 지키며 장언택의 부하 수십 명을 쏴 죽였고 장언택의 다른 사졸들이 감히 이처운에게 맞서지 못했고 마침 날이 저물면서 결국 물러났다. 새벽이 되어 이처운은 장언택의 사졸들 몇 명을 죽이며 전투가 격화되었다. 이처운이 거느리는 친병들이 난리를 듣고 달려와서 이처운을 구원하니 소란이 종식되었고 이처운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처운을 의지하였다. === 후한, 후주 시기 ===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초 부주(府州)의 장관을 맡고 있던 절종완이 이처운을 불러 문하에 두었고 그에게 군무의 처리를 맡겼다. 절종완이 뒤에 등주(鄧州)·활주(滑州)·섬주(陝州)·빈주(邠州)의 절도사를 역임할 때도 이처운은 절종완을 따랐다. 그런데 신평(新平)에 있을 때 절종완의 생질이 예궐하여 이처운의 죄를 무고하자, [[곽위]]가 이를 믿었고 이처운을 의록진(宜祿鎭)으로 좌천시켰다. 절종완이 표문을 올려 이처운의 억울함을 밝히면서 이처운을 다시 절종완의 휘하에 두었다. 955년, 절종완이 임종할 때 세종 [[시영]]에게 표문을 올려 이처운을 쓸 만한 인재라고 칭찬했으며, 때마침 이계훈이 하양(河陽)에 진수하자 이처운을 우직(右職)으로 임명하였다. 이계훈은 처음 이처운을 예우하지 않았으나 장리들을 모아놓고 활을 쏘게 할 때 이처운이 4발을 연발하여 과녁에 명중하자, 이계훈은 이처운을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자신의 모친에게 절을 하도록 명하였으며, 점점 사무를 이처운에게 위임했고 더불어 황하의 나루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때 이처운은 이계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루터에서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 아마 간첩이 있는 것 같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달 뒤에 과연 [[요나라]]의 첩자를 붙잡아 수색하니 [[후촉]]과 [[남당]]으로 보내려고 했던 납서가 발견되었고 곧바로 첩자를 궐하로 압송하였다. 당시 [[후주]]에서 조광윤이 전전친군(殿前親軍)을 거느렸고 이계훈이 절도사에서 파직된 뒤 시영은 이처운을 태조의 막하에 두었고 도압아(都押衙)로 보임시켰다. 959년, 시영이 승하하고 시영의 4남 시종훈이 즉위한다. 960년, 조광윤이 출정하여 진교역(陳橋驛)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이처운은 태조를 추대하려고 모의하는 군대의 움직임을 보고 급거 조광윤의 아우인 조광의에게 상황을 알리고 [[왕언승]]과 모의하였으며, 마인우, 이한초 등을 불러 논의를 정한 뒤 비로소 상황을 조광윤에게 알렸으나 조광윤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윽고 군중이 떠들썩해지자, 조광윤이 능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진교의 변]]으로, 조광윤이 추대를 받아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세우니 바로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였다. 이처운은 진교의 변 당시 결단을 잘했고 계획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태조가 이처운을 칭찬하여 객성사(客省使) 겸 추밀승지(樞密承旨),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제수하였다. === 북송 시기 === 북송이 들어선 뒤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택로(澤潞)의 [[이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처운은 이균을 평정할 때 종군하여 우림대장군(羽林大將軍),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로 승진하였고 행영병마도감(行營兵馬都監)으로 임명되어 [[이중진]]을 토벌할 때 종군하였으며, 이중진이 평정되자 지양주(知揚州)로 부임하였다. 이균과 이중진의 반란을 진압한 뒤 양주 경내가 쇠약해지자, 이처운은 민심의 안정에 힘쓰면서 성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집세를 감면해달라고 상주하였으며, 백성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962년, 수도로 돌아갈 때 늙은이와 어린이를 불문하고 이처운이 수도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려서 여러 날 동안 떠나지 못했다. 뒤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겸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임명되고 저택을 하사받았다. 963년, 낭주(朗州)에서 군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모용연조에게 군대를 이끌어 낭주의 군란을 진압하도록 명하고 이처운을 도감으로 삼았다. 당시 태조가 이처운에게 직접 방략을 전수했고 한수(漢水)에서 합류하도록 명했다. 모용연조와 이처운을 파견하기 직전, 조정에서는 내주방부사(內酒坊副使) [[노회충]]을 [[남평]]에 사자로 파견하여 남평의 정세를 살피게 했으며, 노회충이 돌아와 남평을 공략할 수 있는 형세라고 상주하니 마침내 이처운에게 남평을 도모하도록 명하였다. 이처운은 양주(襄州)에 이르러 먼저 합문사(閤門使) [[정덕유]]를 보내 [[정명가도|남평에 길을 빌리도록 하고]] 섶나무와 물을 송군에 지급하도록 청했으나 남평의 [[고계충]]은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백 리 밖에서 식량과 마초를 공급하도록 청원하였다. 이처운이 다시 정덕유를 보내 고계충에게 권유하니 이에 비로소 이처운의 청원을 따랐다. 이처운은 뒤에 군중에 다음과 같이 명했다. >강릉성(江陵城)에 입성한 뒤 지정된 길을 따르지 않거나 무단으로 민가에 침입하는 자가 있다면 참수하겠다! 송군이 형문(荊門)에 도착한 뒤 고계충은 숙부인 고보인(高保寅)과 군교 양연사(梁延嗣)를 보내 쇠고기와 술을 송군에게 바치며 이처운의 군대를 위로하고 또한 송군의 정세를 정찰하게 했다. 이처운은 고보인과 양연사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다음날 그들에게 남평으로 먼저 돌아가라고 명했다. 양연사는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 고계충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 형문은 강릉으로부터 1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날 저녁에 고보인 등을 불러 모용연조의 군막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이처운은 몰래 수천 명의 경기병을 보내 강릉으로 진군하게 했다. 한편 고계충은 단지 고보인과 양연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송나라의 대군이 당도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마중을 나갔다가 강릉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서 이처운을 조우하였다. 이처운은 고계충에게 읍하고 모용연조를 기다리도록 명했으며, 자신은 친병들을 거느리고 먼저 강릉성 북문으로 들어가서 강릉성의 요충지를 분할 점령했다. 고계충은 결국 이처운에게 항복했고 남평은 이렇게 멸망한다. 남평의 항복을 받아낸 이처운은 곧바로 강릉의 군졸 1만여 명을 징발하여 밤낮으로 낭주를 향해 달렸다. 또한 우선 장수들을 파견하여 휘하의 군대와 강릉의 군대를 나누어 악주(岳州)로 보내고 삼강구(三江口)에서 낭주의 반란을 진압하며 700여 척의 배를 노획하고 4,000명을 참수하였다. 이처운은 다시 예강(澧江)에서 장종부(張從富)와 조우하여 장종부를 물리쳤으며, 오산채(敖山砦)까지 추격하고 군란을 일으킨 군졸들을 사로잡았다. 이처운은 사로잡은 포로들 중 체격이 비대한 이들 수십 명을 풀어서 휘하 군인들에게 나눠 먹도록 명했으며, 젊고 건장한 포로들에게 묵형을 내려서 먼저 낭주로 입성하게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서 오산채에서 머물다가 새벽이 되어 모용연조의 大軍이 뒤이어 도착하였다. 묵형을 받은 이들은 이처운의 명령대로 먼저 낭주에 입성하여 포로로 붙잡힌 이들이 모두 송군에게 잡아먹혔다고 알렸고, 낭주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여 성에 불을 놓고 달아났다. 당시 무평군절도사 주보권(周保權)은 나이가 아직 어려서 왕단(汪端)의 겁박을 받아 강남채(江南砦)의 한 절에 숨었는데, 이처운은 휘하 장수인 전수기(田守奇)를 보내 주보권을 사로잡았다. 이후 담주(潭州)로 입성하여 송나라는 형호(荊湖) 지역을 차지한다. === 모용연조와의 불화 === 송군이 양주(襄州)에 이를 때 길거리에서 떡을 파는 이들이 갈수록 줄어들었는데, 떡을 파는 이들은 군인들에게 2배의 돈으로 떡을 팔았다. 이처운은 대표로 2명을 붙잡아 모용연조에게 압송하였지만 모용연조가 분노하여 이들을 받지 않았고 서너 번을 오가다가 이처운은 결국 문제의 2명을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여 효수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모용연조의 소교(小校) 사의(司義)가 형주의 객장인 왕씨(王氏)의 집안에 머물다가 술김에 난폭한 짓을 저지르자, 왕씨가 이처운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이처운은 사의를 불러 꾸짖었고, 사의 또한 이처운을 모용연조에게 참소하였다. 백호(白湖)에 이르러 이처운은 군인들이 민가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민가에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자 사람을 보내 군인들을 체포했는데, 뜻밖에도 이들의 정체가 모용연조의 기병들이었기에 이처운은 그들의 등을 채찍으로 때렸다. 이 사실을 접한 모용연조는 분노하여 약탈을 저지른 자신의 기병들을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이처운과 모용연조는 매우 불화하여 더더욱 서로를 탄핵하고 비난하였다. 조정에서는 모용연조가 숙장이기에 모용연조를 사면하고 이처운을 치주자사(淄州刺史)로 좌천시켰다. 이처운은 두려워하여 감히 해명을 하지 못하였다. 이처운은 치주에 몇 년 동안 있다가 966년 사망하였다. 이처운의 부고가 전해지자, 태조는 정무를 중단하고 이처운에게 선덕군절도사(宣德軍節度使), 검교태부(檢校太傅)를 추증하였으며, 낙양의 편교촌(偏橋村)에 사당을 내리고 장사지냈다. == 기타 == 이처운은 도량이 있었고 당대의 일에 대해 담론하는 것에 뛰어났으며, 평소에는 공적과 명성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형호를 정벌할 때 이처운은 측근의 신분으로 군대를 거느려 스스로 태조의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태조에게 보답하려고 했지만 일에 임할 때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고 남들의 의견을 꺼리지 않아서 결국 좌천을 당했다. 개보(開寶) 연간에 조광윤에게 이처운의 차녀를 비로 보냈는데, 이처운의 차녀가 바로 [[명덕황후(북송)|명덕황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