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전직 장성군수, rd1=이청(1957), other2=가담항설의 등장인물, rd2=이청(가담항설), other3=배우, rd3=이청(배우), rd4=이청(축구선수), other4=축구선수, rd4=이청(축구선수))] [include(틀:역대 운현궁 주인)] [include(틀:왕공족)] ---- ||<-3> {{{#ffffff '''운현궁 4대 사손'''}}}[br] {{{#ffffff {{{+1 ''' 이청[br]李淸'''}}}}}}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Yi_Cheong.jpg|width=100%]]}}} || ||<-2><#4a2d5b> '''{{{#ffffff 성명}}}''' ||<(> 이청(李淸) || ||<|2><-2><:><#4a2d5b> '''{{{#ffffff 출생}}}''' ||[[1936년]] [[4월 23일]] ([age(1936-04-23)]세) || ||[[도쿄부]] [[도쿄도|도쿄시]] [[시부야구]] 도키와마츠 || ||||<:> '''{{{#ffffff 아버지}}}''' ||<(> [[이우]] || ||||<:> '''{{{#ffffff 어머니}}}''' ||<(> [[박찬주(교육자)|박찬주]] || ||||<:> '''{{{#ffffff 형제}}}''' ||<(> 남동생 [[이종#s-5|이종]] || ||||<:> '''{{{#ffffff 부인}}}''' ||<(> 김채영[* 1949년 생. 1971년 결혼.] || ||||<:> '''{{{#ffffff 자녀}}}''' ||<(> 장남 이영주(1971~73년생)[* 운현궁 종손 신분으로 당숙인 [[이준(1961)|이준]], 고모할머니인 [[이해경]]과 함께 제주도에 방문한 적 있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장남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증손자. 어머니는 [[박영효]]의 서손녀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이다. 이우의 사망 후에 일시적으로 [[공작(작위)|공위]]를 계승하여 '이청 공 [[전하(호칭)|전하]]'의 경칭을 받았다. 즉, 일제강점기 정식 [[왕공족]]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 고종의 실질적인 장손이다. == 생애 == 1936년 4월 23일에 [[일본 제국|일본]] [[도쿄]] 시부야 도키와마츠에 위치한 [[이우]] 공가 도쿄 별저[* 현 궁내청 보관 기록에 의하면 도쿄 공저의 자세한 위치도 나오는 데 당시 공가 도쿄 별저 주소는 도쿄도 시부야구 도키와마츠쵸 101번지.현재 이곳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시부야 캠퍼스 중등부 인근이라고 한다.]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아버지 [[이우]]를 따라 1945년 [[히로시마]]에 가야 했고 실제로 갈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기 직전에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으로 인해서 결국 아버지 혼자만 히로시마에 갔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 이우가 장남까지 일본에 끌려가지 않도록 일부러 건강 이상을 유도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청은 본인의 회고록을 통해서 이를 부정했다. 전후 구 황실 재산을 몰수했고, 1950년대 당시 종종 반이승만 세력들 사이에서 옹립론이 터져나오는 존재인 [[영친왕]]의 입국을 막았고, [[8.15 광복]] 직전 기준으로 황실의 큰어른이던 [[순정효황후]]를 [[창덕궁]]에서 쫓아내는 등 구 황실에 적대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작 자신의 아들이 일찍 사망하자 웃기게도 구 황실의 후손인 이청을 자신의 양자로 달라고 [[전주 이씨]] 가문에 요청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측에서는 방계인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에게 황실의 직계 자손을 양자로 들여보낼수는 없다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항렬이 안 맞았다. 이승만과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청이 이방원의 21대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항렬상 고조부 - 현손뻘 차이가 난다.(즉, 이승만은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위치한 마케트대학교(토목공학과)와 드폴대학교 대학원(공학과)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의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에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운현궁]]의 마지막 주인[* [[1993년]] [[서울특별시]]에 매각.]이기도 하다. 2005년 7월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1931)|이구]]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구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구황실인 전주 이씨 가문의 적통을 누가 이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자녀들 중 [[순종(대한제국)|순종]]은 자녀가 없었고 영친왕의 자손은 이구의 사망으로 대가 끊겼기 때문에 고종의 후손은 의친왕의 자손들밖에 남지 않았다. 의친왕의 12명의 아들 중 장남 이건은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으므로, 일본으로 귀화한 이건의 자손들을 제외한다면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장남 이청이 생존해있는 고종의 직계 자손 중 장자 승계 순위가 가장 높았다. 그러나 족보상으로는 이청의 아버지인 이우가 방계황족인 [[영선군]][* 고종의 조카] 이준용에게 입적했고, 의친왕의 3남 이방은 소헌세자파 이기손에게, 4남 이창은 은전군파 이헌용에게, 5남 이주는 인평대군파 이인용에게 입적하고, 6남 이곤은 의친왕의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이어야 했고, 7남 이광은 흥녕군파 이기용에게, 8남 이현은 평생 독신이었기에, 의친왕의 9남인 [[이해룡|이갑]]의 장남 [[이원(1962)|이원]]이 이구의 양자로 입적하여 전주 이씨 가문 수장과 대한제국 구 황실 수장 자리를 승계받았다.[* 의친왕의 장남 이건(모모야마 겐이치)은 상술했듯이 일본으로 귀화했고 의친왕의 2남 이우부터 8남까지는 전부 다른 방계 황족들에게 입양되거나 후사 없이 사망했으며 6남 [[이곤(1919)|이곤]]과 그 후손들의 경우 입양은 가지 않고 의친왕 가문을 잇기로 했다.] 다만 민법상 사후양자제도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구 사망 당시 이 승계에 대해 상당히 논란이 많았다. 특히 의친왕의 10남 [[이석]]은 당시 이원의 승계를 극구 반대하여 승계를 강행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측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청 본인은 전주 이씨 가문과 황실 관련 일에 일절 나서지 않고 있다. 2018년에 [[흥원|흥선대원군묘]]를 기증한 공으로 경기도로부터 직접 가서 감사패를 받아야 했으나 당시 이청 본인이 병석에 있어서 13살 연하의 아내가 대신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2017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남연군묘|묘]]도 기부한 데다가 2018년 기사에서 그가 자신의 생전에 황실의 재산이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아버지 이우와 동생 이종[* 1966년에 미국 유학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의 묘 근처에 자신의 묫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었다. [[분류: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분류:이왕가]][[분류:운현궁 종주]][[분류:1936년 출생]][[분류:시부야구 출신 인물]] [[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