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이태석.jpg|width=100%]] || || 성명 ||이태석(李泰錫) || || 생몰 ||[[1901년]] 7월 17일 || || 사망 ||[[1950년]] 10월 19~20일 (향년 49세)|| || 직업 ||[[목사]] || || 종교 ||[[기독교]] {{{-2 ([[개신교]], [[성결교회]] → 하나님의 교회)}}}[* 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한신)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한영)과 기독교한국성결회에 해당함] || || 학력 ||[[경신학교]] {{{-2 (졸업 / 13회) }}} [br][[숭실학교|평양 숭실전문학교]] {{{-2 (졸업) }}}[br][[서울신학대학교|경성성서학원]] {{{-2 (졸업) }}}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목사]], 개신교 [[순교자]]. == 생애 == 1901년 7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내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경신중학교]] 수학중 18세에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맨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등 이후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 [[장연군|장연]]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이때 고향 [[장연군|장연]]에 있는 [[태탄사립학교]]에서 농촌 아동들을 위해 훈도(현, 교사) 일을 맡아 아동들에게 나라사랑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20년 [[숭실대학교|평양숭실중학교]] 편입학하였다. 1921년 [[숭실대학교|평양숭실중학교]]에서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활동이 발각되어 황해도 해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년후 석방되어 1922년 [[숭실전문학교|평양숭실중학교]]에 복학하였다. [[숭실대학교|평양숭실중학교]] 수료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명교중학]]에 입학을 하였다. 이 시기에 공부에 매진하였다. [[명교중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의 명문대학인 동경의 [[중앙대학]]에 진학하여 예과를 거쳐 상과를 1927년에 졸업하였다. 1927년 조선으로 귀국하고 1928년경 평생의 반려자인 여교사 출신의 김송희 양과 결혼을 하였다. 이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진학하여 1932년 3월에 졸업하였다. [[서울신학대학교|경성성서학원]] 졸업반었던 1931년 9월 20일 금산교회를 개척하고 동년 10월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서울신학대학교|경성성서학원]]은 재학생이 교회개척을 하는 체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1933년 4월 7일 강경교회에서 부임하여 열심을 다해 사역을 하였고, 1936년 1월 군산중앙성결교회의 제3대 담임으로 부임을 하였다. 1936년 10월 그 유명한 '''하나님의 교회 사건'''으로 인해 군산중앙성결교회를 사임하고 동년 11월 성결교회를 탈퇴하고 곧바로 1936년 11월 25일'''기독교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하고 창립멤버로 활약하였다. 1939년 11월경에 평양상수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기독교 하나님의 교회''' 소속일 때 신암교회에 부임하여 사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확한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해방 후인 1949년경에 평양신양리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던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공산당의 지배 하에서 교회당의 폐쇄와 예배금지에 강하게 투쟁하다가 [[조선인민군]]에 의해 1950년 10월 11일 연행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약 열흘 가량 지난후 평양 평촌리 야구장에서 총살당해 시신만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ttps://pck-pcmma.com/134/?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938052&t=board|출처]]. [각주] [[분류:개신교 순교자]][[분류:황해도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경신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숭실대학교 출신]][[분류:서울신학대학교 출신]][[분류:총살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