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인 KIA 타이거즈 소속의 코치, rd1=이해창(1987), other2=다른 동명이인, rd2=이해창)] || '''{{{#000 이해창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br] [[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width=100]][br]'''KBO 리그''' '''{{{우승반지}}}''' || ||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fecd00 1985}}}]]''' || ---- || [[KBO 리그 역대 타이틀홀더#s-1.6|[[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width=150]]]] [br] '''{{{#ffffff 1987 KBO 리그 도루왕 }}}''' || ---- [include(틀:LG 트윈스 주장)]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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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창이 당장 내놓지 못하갔네?!"'''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따졌다. 김동엽의 기세에 질린[* 사실 당시 김진영도 한 성깔 하던 [[다혈질]]로 유명한 야구인 중 하나다. 선수 시절부터 감독 시절까지 다혈질 성격 탓에 발생한 에피소드가 여러 개 되고,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이던 1983년 6월 1일 [[MBC 청룡]]과의 경기 중 8회초 역전 득점이 무효가 되자 성질을 못이기고 길길이 날뛰며 이기역 심판위원장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다 폭행 혐의로 구속수감 되며 그 해 시즌을 말아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 김진영도 질려서 물러날 정도였으니 김동엽이 얼마나 강하게 대들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김진영은 "미안하다. 우리 애들이 뭘 모르고 그런것 같으니 그냥 후배가 데려가시게...;;;" 라며 사과했고 이해창은 예정대로 건국대 유니폼을 입었다. 건국대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 입단했는데[* '''대학 졸업도 하기 전'''인 '''4학년 2학기''' 때부터 농협 선수로 뛰었다. 물론 규정 위반이었으나 야구계의 거물이던 장인어른이 뒤를 봐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1984년에 [[정삼흠]]이 고려대 소속을 유지한 채 일종의 파견 형식으로 [[포스틸 야구단|포항제철 야구단]]에서 뛰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72학번 동기들이 당시 창단한 [[롯데 자이언트]]에 거액을 받고 입단하는 것을 보고 심사가 뒤틀린 이해창은 이듬해 [[육군]] 야구단에 입대하였다.[* 다만 이에 입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따르는데, [[천일평]]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우선 이해창은 고아에 독자였기 때문에 당시 군입대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당시 육군 경리단의 전력이 하락하자 높으신 분이 강제로 입대시켜 버렸다고 한다. 장인이었던 풍규명이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야구단에서 군 생활을 해야 했다.] 문제는 당시 [[실업야구]] 선수들은 입대 시엔 대부분 휴직을 했지만 이해창은 아예 '''농협에 사직서를 던지고''' 입대해 버린 것. 제대 후 [[롯데 자이언트|롯데]] 입단을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이해창은 '''육군 야구단에서 제대한 후 기어이 롯데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는 실업야구 사상 선수 자의로 팀을 옮긴 최초의 사례였다.[* 팀의 해체 또는 인수합병으로 인해 소속을 옮긴 경우야 많았지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40400329208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4-04&officeId=00032&pageNo=8&printNo=10309&publishType=00020|당시 기사]] 1982년 프로 출범으로 실업 롯데가 [[롯데 자이언츠|프로팀으로 전환되면서]] 해체되자 그 해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화장품 야구단]]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 [[파일:external/blogfiles14.naver.net/15-3873-solatesowhat.jpg]] ||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시상식에서 우승컵을 든 이해창 || 평소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특히 국제대회에서 맹활약 한 적이 많았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에서 [[미국]]과의 결승전 때 쐐기 적시타를 날렸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주장이자 대회 내내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일본과의 최종전에서는 8회말 김재박의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 성공 후, 찬스를 이어가는 중전 적시타로 [[한대화]]의 결승 스리런 홈런의 발판을 놓기도. 결국 한국이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데 대표팀 주장으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51108201052663183.jpg]] || || 1983년 후기리그 우승컵과 함께. 왼쪽은 [[이종도]], 오른쪽은 김재박 || 1982년 [[MBC 청룡]]에 지명[* 당시 지역연고 선수는 무조건 그 지역 팀에서 선출했지만, 서울은 MBC 청룡과 OB베어스가 2:1로 배분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 때문에 첫해 1라운드로 MBC청룡은 이해창과 실업야구 최고 스타중 한명인 [[김재박]]을 지명했고, OB는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박철순]]을 선택했다.] 되었지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세계선수권 대표로 선발]]되어 프로진출이 1년 유보되며[* 세계대회는 아마추어만 출장할 수 있기 때문에, 프로 입단 시 당연히 출전자격 박탈이었다. 이 때문에 1982년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장한 선수들은 프로구단에 입단할 연령이 되었고, 실제로 선출도 결정된 상태였지만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업야구에서 뛰었다. 이런 일은 1986년 아시안게임이나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도 벌어졌다.] 이듬해인 1983년 MBC에 입단한 이해창은 [[김재박]]과 [[테이블 세터]]를 이루며 '''쌕쌕이''' 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라운드를 휘젓는 주루 플레이로 맹활약 했지만 연봉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켜 1984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트레이드 상대가 프로원년 결정적인 만루홈런 2방(을 허용한)의 주인공 [[이선희(야구)|이선희]]였다.]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1222143_2.jpg]]||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삼성에서도 1985~1986년 두 시즌을 치른 후, 연봉협상으로 구단과 마찰을 빚었다. KBO에 연봉조정 신청까지 갔는데, 당시 성적 면에서 활약이 큰 이해창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지자, '선수에게 지는 것은 망신'이라고 판단한 구단에 의해 1987년 [[청보 핀토스]]로 현금 트레이드 되었다.[* 연봉조정 신청에서 선수측이 승리한 것은 이후 LG의 [[류지현(야구)|유지현]]이 첫 사례가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청보 핀토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해창은 1987년 시즌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54개의 도루로 생애 첫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다.[* 더불어 [[삼청태현|인천 연고팀]] 역사상 최초로 획득한 타자부문 개인 타이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 이해창의 타율은 0.232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몇 번 안 되는 출루하는 족족 베이스를 훔쳤다는 이야기니 어찌 보면 또다른 의미에서 대단한 거다.] 198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6시즌 통산 성적은 타율 0.271, 32홈런, 181타점, 144도루, 317득점. 전성기 시절 그의 라이벌은 후배 [[김일권]]이었는데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 치열한 도루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대부분 김일권의 승리로 끝났다. == 은퇴 후 == 현역에서 물러난 후 1991년 [[KBS]] [[라디오]] 해설위원을 맡은 걸 빼면 야구계를 떠나 유통업, 건설업 등의 사업을 벌였지만 두 차례나 [[사기]] 사건으로 쇠고랑을 차는 등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던 듯 하다. 이후 서울에서 쇠고기 식당을 차려 조용히 살고 있던 중 2018년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6개월 정도 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재활치료 끝에 현재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여 의사소통이나 걷기 등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이다. [[2019년]] [[2월 22일]] 방영된 [[TV는 사랑을 싣고]]에 [[홍성흔]]이 [[리틀야구]] 선수 시절 팀을 방문하여 원 타임 코칭을 해준 인연으로 출연했다. 홍성흔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에서 이해창과 32년만에 감격스럽게 해후했고, 이해창이 어린 홍성흔에게 조언해준 "절대 포기하지 마라", "넌 긍정적으로 잘할 수 있다", "네가 열심히 하면 야구장에 너의 이름이 울려퍼질 것이다" 라는 세 마디를 금과옥조로 삼아 야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며 이해창에게 다시금 감사를 드렸다. 이에 이해창도 홍성흔이 코치로도 성공한 것이 뿌듯하다며 그를 대견해 했다. == 여담 == * 이해창이 '''쌕쌕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주력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83년 9월 14일, [[잠실야구장]] 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2대 3으로 뒤진 8회말 1사 후에 [[김재박]]이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에게 내야안타를 뽑으며 출루했고, [[이광은]]은 2루수 플라이에 그치며 투아웃이 되었지만 이해창이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터뜨렸다. 좌익수 [[정현발]]의 송구가 유격수 [[오대석]]의 글러브에 들어간 시점에서 3루를 돌아 불과 두세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김재박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홈에 뛰어들었다'''. 누가 봐도 [[자폭]]이 분명한 무모하기 그지 없는 주루 플레이였는데 깜짝 놀란 오대석이 포수 [[이만수]]에게 송구한다는 게 그만 김재박의 헬멧을 맞고 백스톱 쪽으로 빠지면서 김재박은 행운의 득점을 올리며 3대 3 동점을 만들었다. 사실 이것은 행운이었다기 보다는 김재박이 이만수의 미트 위치를 보고 주루 방향을 잡아서 송구를 지능적으로 방해한 고단수의 주루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공이 뒤로 빠진 사이에 2루를 거쳐 3루까지 진루한 '''이해창도 망설임 없이 홈을 향하여 질주하였고''', 백스톱으로 달려간 이만수가 홈 커버를 들어온 1루수 [[함학수]]에게 황급히 공을 던졌지만 이해창은 태그를 피하며 홈 베이스를 터치하면서 결승 득점을 올렸다. 이날 경기는 MBC의 4대 3 승리로 끝났고 그 해 MBC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3루 코치로 나가 있던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재박이 홈에서 살았길래 '아 이제 3대 3 동점에 (4번타자)[[이종도]]가 나오니까 해볼만 하겠다' 생각하는데 누가 눈앞을 쌩 하고 지나가더라고. 이해창이야. 깜짝 놀라서 [[고만해, 미친놈들아!|아이고 저 미친 놈! 스톱 스톱!!]] 했는데 벌써 홈에 들어갔더라고. 사람이 그렇게 빠른 줄 진짜 몰랐지"''' 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 1986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이해창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고 위에 언급한 대로 KBO에 제기한 연봉조정 신청이 이해창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삼성은 부랴부랴 이해창의 트레이드를 추진하였고, 이해창에게도 "현금 3천만원 선에서 (이해창을) 데려갈 구단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라" 며 권유하기도 했다. 즉 선수 자신이 트레이드 될 팀을 스스로 물색해 보라고 할 정도로 이해창의 트레이드는 기정 사실이었던 셈이다. 이 때 뒷이야기로 이해창은 당초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 선배인 [[배성서]]가 감독으로 있던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을 원했고 배성서 감독도 신생팀으로서 한 명이라도 전력보강이 절실했던 지라 이해창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당시 빙그레 단장이던 노진호와 삼성의 윤경헌 단장 또한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시절 한솥밥을 먹은 인연까지 묶어 이해창의 빙그레 행을 추진했지만, 삼성은 이해창+[[정진호(1956)|정진호]]를 묶어서 보내려고 했던 반면 빙그레는 부상으로 실력이 저하된 정진호 대신 [[김동재]]나 [[오대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청보 핀토스]] 박정삼 단장[* 그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초기 언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당한 후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언론계로 돌아와 [[국민일보]] 부사장, 굿데이 대표이사를 거쳐 [[참여정부]] 시절 초기에 무려 [[국가정보원]] 국내정보 담당 2차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한국관광공사]] 산하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은 [[한국일보]] 수습기자 선배였던 윤경헌 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번에 [[김기태(재일교포)|김기태]]를 데려갈 때 내야수 좀 달라고 했는데 힘들다고 하더니,[* 당시 청보는 김기태를 삼성에 내주고 반대급부로 내야수 [[김근석]]과 외야수 [[정현발]]을 영입했는데, 내야수가 더 필요하다는 청보의 요청에 삼성은 '''"[[강기웅]]과 [[류중일]]을 둘 다 잡지 못하는 한 우리도 내야수 사정이 빡빡하다"''' 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근데 삼성은 그게 실제로 이루어졌네???]](...)~~] 빙그레와는 정진호가 어쩌구 김동재가 저쩌구 하느냐" 라고 섭섭함을 토로하자 머쓱해진 윤 단장은 박 단장에게 "미안하게 됐다. '''그럼 이해창이라도 데려 가겠는가?'''" 라고 제의했고[* 마침 빙그레가 이해창에 대한 영입 의사를 철회한 시점이라 가능한 얘기였다.] '''으아니 이게 웬 떡이냐''' 싶던 박 단장은 즉시 김정우 구단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제주도]]에서 훈련 중이던 [[강태정]] 감독과도 신속한 협의를 거쳐 OK 사인을 받아내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이해창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후일 박정삼 단장은 인터뷰 때 "중간에 끼어들어 이해창을 채간 격이라 빙그레에게 미안한 감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해창이란 [[베테랑]]을 영입하여 적어도 우리 팀 전력이 15%는 상승했다고 본다" 라며 털어놓기도 했다.] * 아들인 이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구를 했다.[* 사고쳐서 낳은 아들맞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고]] 졸업 후 삼성에 지명되었으나 [[건국대]] 진학을 선택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LG에 지명되었으나 미국 진출을 한다고 LG 입단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다. 전역 후 미국 진출은 커녕 2003년 --아빠가 뛰면서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우승반지 득템했던]]-- 자신을 처음 지명했던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가 정식 선수가 되어, 10월 2일 [[이승엽]]이 56호 홈런을 기록한 경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군 등판을 하여 1.2이닝동안 3피안타 1탈삼진 1자책점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은퇴했다. 은퇴 뒤에는 방황하다가 [[대만프로야구]]로 진출하였는데 거기서도 털리는 바람에 결국 세미프로인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 야구팀에 입단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 한국 야구계가 알루미늄 배트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1975년 4월 건국대가 [[하와이]] 원정을 갔을 때 자비로 알루미늄 배트를 사들여와 소개한 바가 있다.] * [[고우영]] 화백과 친분이 있어서 현역시절 그를 모델로 한 전기 [[만화]]를 1983년 [[새소년]]에 연재하기도 했다. 연재 당시 제목은 '''백기사의 아들''', 단행본으로는 '''달려라 야구왕'''이란 제목으로 1986년에 우석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그가 도루왕을 차지한 해에 동명이인의, [[이해창(1987)|아들뻘 후배 선수]]가 태어났다. 1987년생 이해창은 현재 [[한화 이글스]]의 포수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고 있어 재미있는 대조점을 보여주고 있다. * [[이회창|모 정치인]]과 이름이 흡사한 관계로, [[마구마구]]에서 삼성 or 청룡덱 VS (빙그레) 이글스덱이 맞붙을 경우, 이글스 측 게이머가 빙그레 [[김대중(야구선수)|김대중]]을 투수로 등판시켰을 때 위엄차게 [[대타]]로 등장하기도 한다. ~~본격 [[제15대 대통령 선거|영혼의 맞다이]]~~ ~~[[이해찬|이 정치인]]하고도 많이 비슷한데?~~ * 마구마구 모바일에는 윤보현이라는 가명으로 들어가있다. 청보덱에서 그나마 쓸만한 유격수 테이블세터..였는데 [[2016년]] 중순쯤에 갑자기 엘리트카드로 승격되었다. * 위에 언급한 대로 [[홍성흔]]이 도봉리틀야구단에서 뛸 때 잠깐 그를 지도한 연이 있다. 정확히는 리틀야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하루 동안 재능기부를 했던 것인데 그 팀에 홍성흔이 있었던 것. 그 어리고 암울했던 시절[* 당시 홍성흔은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지방 근무로 인한 양친의 부재, 그리고 가난 때문에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해창도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으니 동병상련을 느낀 듯 하다.]에도 야구에 열정적으로 임하던 홍성흔을 눈여겨봤다고 하며, "꼬마선수도 선수고 나도 선수였으니 선수끼리 보고싶었다"며 자신을 찾아준 홍성흔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냈다. * [[이만수]]에 버금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서울 한우리교회에서 이해창 안수집사와 아내인 풍옥희 권사[* 기독교 비영리 단체인 복음의전함 소속이며, 아들 이준의 SNS를 링크건 것을 보면 본인이 맞는듯 하다.]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랜기간 신앙생활을 한 듯하다.--이런 분이 어떻게 속도위반을...-- == 연도별 성적 == * '''{{{#red,#ff0000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15> {{{#ffffff 역대 기록}}} || || {{{#ffff00 연도}}} || {{{#ffff00 소속팀}}} || {{{#ffff00 경기}}} || {{{#ffff00 타수}}} || {{{#ffff00 타율}}} || {{{#ffff00 안타}}} || {{{#ffff00 2루타}}} || {{{#ffff00 3루타}}} || {{{#ffff00 홈런}}} || {{{#ffff00 타점}}} || {{{#ffff00 득점}}} || {{{#ffff00 도루}}} || {{{#ffff00 4사구}}} || {{{#ffff00 장타율}}} || {{{#ffff00 출루율}}} || || 1983 ||<|2> [[MBC 청룡|MBC]] || 100 || 388 || .294 || '''114''' [br] (3위) || '''21''' [br] (3위) || '''4''' [br] (4위) || 8 || 46 || {{{#ff0000,#ff0000 '''65'''}}} [br] (1위) || '''26''' [br] (3위) || 48 || .430 || .372 || || 1984 || 100 || 374 || .273 || 102 || 16 || '''6''' [br] (4위) || 7 || 36 || {{{#ff0000,#ff0000 '''62'''}}} [br] (1위) || '''36''' [br] (2위) || 48 || .404 || .355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 || {{{#ffffff 타수}}} || {{{#ffffff 타율}}} || {{{#ffffff 안타}}} || {{{#ffffff 2루타}}} || {{{#ffffff 3루타}}} || {{{#ffffff 홈런}}} || {{{#ffffff 타점}}} || {{{#ffffff 득점}}} || {{{#ffffff 도루}}} || {{{#ffffff 4사구}}} || {{{#ffffff 장타율}}} || {{{#ffffff 출루율}}} || || 1985 ||<|2> [[삼성 라이온즈|삼성]] || 109 || 352 || .270 || 95 || 12 || 3 || 7 || 43 || '''63''' [br] (5위) || 14 || 54 || .381 || .367 || || 1986 || 95 || 238 || .315 || 75 || 14 || 2 || 3 || 19 || 44 || 7 || 18 || .429 || .360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 || {{{#ffffff 타수}}} || {{{#ffffff 타율}}} || {{{#ffffff 안타}}} || {{{#ffffff 2루타}}} || {{{#ffffff 3루타}}} || {{{#ffffff 홈런}}} || {{{#ffffff 타점}}} || {{{#ffffff 득점}}} || {{{#ffffff 도루}}} || {{{#ffffff 4사구}}} || {{{#ffffff 장타율}}} || {{{#ffffff 출루율}}} || || 1987 || [[청보 핀토스|청보]] || 105 || 327 || .232 || 76 || 14 || 3 || 3 || 23 || 55 || {{{#ff0000,#ff0000 '''54'''}}} [br] (1위) || 38 || .321 || .310 || || {{{#ff9933 연도}}} || {{{#ff9933 소속팀}}} || {{{#ff9933 경기}}} || {{{#ff9933 타수}}} || {{{#ff9933 타율}}} || {{{#ff9933 안타}}} || {{{#ff9933 2루타}}} || {{{#ff9933 3루타}}} || {{{#ff9933 홈런}}} || {{{#ff9933 타점}}} || {{{#ff9933 득점}}} || {{{#ff9933 도루}}} || {{{#ff9933 4사구}}} || {{{#ff9933 장타율}}} || {{{#ff9933 출루율}}} || || 1988 ||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 68 || 194 || .237 || 46 || 11 || 1 || 4 || 14 || 28 || 7 || 36 || .366 || .357 || ||<-2> '''[[KBO 리그|KBO]] 통산''' [br] (6시즌) || 577 || 1873 || .271 || 508 || 88 || 19 || 32 || 181 || 317 || 144 || 242 || .390 || .352 ||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각주]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953년 출생]][[분류:1983년 데뷔]][[분류:1988년 은퇴]][[분류:외야수]][[분류:우투우타]][[분류:MBC 청룡-LG 트윈스/은퇴, 이적]][[분류:삼성 라이온즈/은퇴, 이적]][[분류: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은퇴, 이적]][[분류:선린인터넷고등학교 출신]][[분류:건국대학교 출신]][[분류:KBO 도루왕]][[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월드 게임 메달리스트]][[분류:1981 산타클라라 월드 게임 메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