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1 李顯忠[br]이현충}}}''' || || '''시호''' ||충양(忠襄) || || '''성''' ||이(李) || || '''이름''' ||세보(世輔) → 현충(顯忠) || || '''출신''' ||수덕군(綏德軍) 청간현(靑澗縣)[* 지금의 섬서성 청간] || || '''생몰''' ||1109년 ~ 1177년 || || '''부친''' ||이영기(李永奇)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의 항금명장이자 민족 영웅이며, 초명은 이세보(李世輔)이다. 수덕군(綏德軍) 청간현(靑澗縣) 사람이다. == 생애 == === 초기 === 1109년 출생으로 장수 집안 출신이었으며 초명은 이세보였다. 아버지 이영기를 따라 전선을 드나들었다. 송 고종 시기 [[금나라]]의 군대가 남하하여 연안 지역을 함락하였고 그와 그의 부친은 금나라의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금나라 사람들은 송군의 민심을 사기 위해 이현충 부자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때 유예의 위제 정권은 중원 사람들을 징발하여 송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하자, 이현충으로 하여금 연안 군마를 이끌고 동경으로 향하도록 명령하였다. 이현충이 행차할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동행이 기회가 되면 남으로 돌아가라. 남귀가 성사되면 나도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 그 이후 동경[* 허난성 카이펑시]에 도착하여 이남로 도장을 수여받았다. 그 이후 심복 뇌찬을 밀반입하여 밀랍서를 임안으로 보내 남쪽으로 돌아가는 일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 정권은 곧 유예의 제 정권을 폐지했다. [[완안올출]]은 이현충의 뛰어난 기예로 동주[* 현재의 섬서성 일대]를 다스리는 선사를 받았다. 이헌충이 통주로 간 후 황사성 등을 보내 밀서를 사천 일대에서 절강까지 남송 정권에 남귀 사실을 알렸다. 금의 원수 사리가 동주를 마시자 이현충이 계략으로 그를 붙잡고 말을 몰아 성을 나갔다. 낙하에 이르러 배가 기일을 어기고 건너지 못하자 금나라의 군대가 소식을 듣고 쫓아왔다. 이현충이 사리를 잡아다가 송나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높은 언덕 위에서 사리와 화살을 부러뜨려 맹세하였다. 사리가 동의하자 이현충이 그를 산벼랑으로 밀어내고 사람을 보내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아버지 이영기는 가족을 데리고 성을 나갔다가 금나라의 군대에게 추격당해 200여 식구가 살해당했다. === 남송 정권으로 돌아가다 === 이현충은 26명을 데리고 [[서하]]로 달려갔다. 당시 금과 서하 정권에 불화가 있었는데, 이현충은 서하의 골칫거리였던 금의 장수 청면야차를 생포하고 돌아오자 서하 군주는 매우 기뻐했다. 이후 20만 기병을 파견하여 문신 왕추와 무장 팽와를 섬서 초무사로, 이현충을 연안 초무사로 파견하여 군사를 공격하였다. 서하 사람들은 이현충이 송나라에 충성하여 갈등이 생기자 철해자군으로 이현충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현충의 부대는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쌍칼을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웠고, 서하 군대는 크게 무너져 약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인의 군마 약 400필을 얻었고 이현충은 10일 동안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 공고를 내었다. 이후 그가 모집한 군대는 사천 지역의 송군에 투항했고, 남송군은 지금까지 4만의 군대와 군마를 얻었다. 사천선무사 오개는 사람을 보내 이현충을 위로하게 했다. 이후 임안에 이르러 송 고종의 접견을 받은 이후 송 고종에 의해 현충(顯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 금나라에 항거하다 === 남송 정권과 금이 화의한 뒤 금나라는 맹약을 지키지 않았고, 금나라 정권은 완안종필을 두 차례나 남침에 출병시켰다. 1140년 [[완안종필]]이 하남을 병범하자 조정에 의해 초무사전군도통제로 임명되어 장군 이귀와 함께 영벽현[* 현재 안후이성 일대]에 파견된다. 1142년 완안종필은 또 대군을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합비를 공략하자 송 고종은 각 방면의 군마들에게 공동으로 금병에 대항하여 이현충의 군과 [[장준]]의 군을 합류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이현충의 군대가 먼저 공성진으로 가서 금병을 물리쳤다. 이후 1160년 금 정권이 또 화의맹약을 깨뜨리고 군대를 보냈고, 남송 정권은 이조충에게 본부의 군마로 적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현충은 통제관 위융수를 보내 기병 200대를 이끌고 금군 5천 명을 물리치고, 또 만여 명의 금군과 싸웠다. 이현충이 직접 기마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아침 대전부터 정오까지 송군은 싸울수록 용감해졌고, 큰 칼로 적진을 쳐부수었지만, 금나라의 군대를 막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번 대전에서 적을 매우 많이 죽였다. 1162년 금나라의 [[해릉양왕]] 완안량은 회서 일대를 공격했다. 회서를 지키는 왕권이 적을 두려워하여 땅을 버리고 도주하자 남송 정권은 왕권을 삭탈관직하고 이현충으로 그 직무를 대체한다. 이현충은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금나라가 점거한 회서 일대의 군을 모두 탈환했다. 이번 전투는 관계가 매우 깊어 남송 정권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남송 정권이 이현충에게 5남 금대를 하사하고 회서제치사, 영국군절도사 등을 하사하였으며, 이후에는 이현충이 태위로 승진하였다. === [[융흥북벌]] === 송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을 개시하였다. 남송 조정은 노신 [[장준(송나라)|장준]][* 당 현종 시기 명재상 [[장구령]]의 동생 장구고의 후손이다. 남송 중흥사장 중 하나인 [[장준(남송)|장준]]과는 동명이인이다.]을 도독 강회군마로 기용하였고 장준은 이현충과 추굉연을 파견했다. 이현충은 영벽현, [[추굉연]]이 홍현[* 현재의 안후이 사현]을 진취시켰다. 이현충이 송군을 이끌고 용감하게 적을 쳐서 영벽 일대의 금군을 대파하였다. 이후 추굉연이 군대를 이끌고 홍현을 공격했지만 오랫동안 포위하지 못했다. 이현충이 영벽에서 투항한 사람을 보내 홍현의 금나라 귀척에게 항복을 권하자 홍현은 성을 들어 항복했다. 그러나 추굉연은 홍현의 수복은 자신의 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현충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6월에 이현충과 추굉연의 군대가 합류하여 숙주(지금의 안후이성 쑤현)를 탈환하고 중원을 진동시켰다. 송 효종은 소식을 듣고 친서 어조로 장병들을 표창하였다. >최근 변보에 의하면 중국과 외국이 고무되어 10년 동안 이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현충은 그 공으로 개부의동삼사에 봉해지고, 전전에서 모두 사직을 지휘하였다. 숙주를 점령한 후, 소홍연은 창고를 열어 장병들을 위로할 계획이었지만, 이현충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재물로 병사들을 포상한 뒤 군사를 성 밖으로 이동시켜 주둔시켰다. 그에 대해 사졸들은 불만이 많았고, 이현충과 추굉연의 갈등도 깊어졌다. 금나라의 장수 [[흘석렬지녕]]이 정병을 이끌고 반격하자 이현충은 군대를 이끌고 격전하여 먼저 금군의 첫 공격을 물리쳤다. 다음날 금나라의 군대가 숙주로 병력을 증원하자 추굉연에게 금나라의 군대를 협공하기 위해 출병하게 했으나 추굉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충은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패퇴했지만, 금군 허난의 부통인 보술 노정방을 주살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숙주성을 잃는 등 남송 정권의 손실이 막대하였고, 북벌은 실패했다. === 만년과 사후 === 후퇴한 후, 먼저 장준을 만나 인장을 바치고 죄를 대했다. 이후 송 효종은 이현충을 과주단련부사로 강등하고 담주에 배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후 조정은 부리 전투의 경위를 알고 그를 무주로 옮겨 배치하였다. 1165년 이현충은 회계로 돌아와 방어사, 관찰사, 절동부총관으로 복귀하여 은 3만 냥, 견 3만 필, 면 1만 냥을 하사받고 그 뒤 다시 조정에 불려가 위무군 절도사, 좌금오위 상장군, 임안부에서 저택을 하사받았다. 송 효종은 이현충을 보고 키가 크고 건장한 모습에 놀라 궁중 각하로 하여금 상을 그리라고 명했다. 이후 태위로 복직한다. 그는 만년에 병이 많아 사관으로 치사한 뒤 흥국궁에 제대하고 소흥부에 거주하며 매년 쌀 2천 석을 하사받았다. 1177년 이현충은 다시 임안으로 불려가 만수관을 올리고 조청을 받들었다. 입궁할 때 효종은 그에게 진봉과 내고금을 주고 건도 연간에 준 저택을 수리하여 그에게 주었다. 동년 7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조정에서 그를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하였다. 이후 남송 영종 시기인 1209년에는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하사받는다. == 평가 == >이 사람은 용감하니 피하는 것이 좋다. >----- >[[완안종필]] >충의는 조정에 돌아가지만, 오직 군주만이 제일입니다. >----- >오개 [[분류:송나라/인물]] [[분류:1109년 출생]] [[분류:117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