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서량 군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서량 제2대 국왕[br]{{{+1 후주 | 後主}}}'''}}} || ||<|2> '''출생''' ||[[399년]] ||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간쑤성|농서군]] 적도현[br](現 [[간쑤성]] 린타오현) || ||<|2> '''사망''' ||[[420년]] (향년 21세) || ||[[서량]] [[주취안시|주천]][br](現 [[간쑤성]] [[주취안시]])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ece5b6 제2대 국왕}}}''' || ||[[417년]] [[2월]] ~ [[420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흠(歆) || || '''부모''' ||부황 [[이고(서량)|태조]][br]모후 황태후 윤씨 || || '''형제자매''' ||10남 2녀 중 차남 || || '''자녀''' ||3남 [[이중이]] || || '''아명''' ||동추(桐椎) || || '''자''' ||사업(士業) || || '''왕호''' ||'''후주(後主)''' || || '''연호''' ||가흥(嘉興, [[417년]] ~ [[420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제2대 군주. 태조 무소왕 [[이고(서량)|이고]]의 차남이었다. 본래 태자였던 이담(李譚)이 일찍 죽었기에 2대 태자로 책봉되었고, 그로 인해 즉위할 수 있었다. 묘호와 시호는 없고 후주(後主)로만 불린다. 이흠의 3남이 [[이중이]](李重耳)로 이중이는 [[당나라]]의 초대 황제였던 [[고조(당)|당고조]] 이연의 6대조였다. 즉 후주 이흠은 당 황실의 직계 조상이었다. == 생애 == 399년, [[북량]]의 [[단업]]이 본래 둔황태수였던 아버지 이고를 대신하여 색사(索嗣)에게 기병 500명을 붙여 둔황태수에 부임시키려고 했다. 이에 이고는 자신의 부하였던 장막, 이부동생 송요, 차남 이흠 등에게 군사를 주어 색사를 치게 하니, 색사는 대패하여 도주했다. 404년, 태자 이담이 요절하여 이흠이 태자가 되었다. 410년, [[북량]]의 [[저거몽손]]이 평화조약을 깨고 서량을 침공해왔다. 이흠은 아버지 이고로부터 명령을 받아 출정하여 북량군을 격파하고 북량의 장수 저거백년(沮渠百年)을 사로잡았다. 417년 2월, 아버지가 승하하자 신하들로부터 대도독, 대장군, 양공(凉公) 등의 미칭으로 추대받으며 가흥(嘉興)으로 개원했다. 건국 시절부터 활약한 숙부 송요(宋繇)를 무위장군, 광하태수에 임명하고, 원로공신 색선(索仙)을 정로장군, 장액태수로 임명했으며, 자신의 어머니인 윤씨를 태후로 높였다. 417년 4월, 북량에서 저거광종(沮渠廣宗)을 거짓 항복시켜 이흠을 유인하도록 했다. 이흠은 이를 모르고 무위 온의(溫宜) 등과 함께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저거광종을 영접하러 나갔다. 저거몽손은 요천(蓼泉)에서 군사 30,000명을 매복시켰는데 이흠이 우연히 이들을 발견하고 퇴각했다. 일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저거몽손은 황급히 이흠을 추격했고, 양국의 군대는 해지간(解支澗)에서 만나 교전했다. 격전 끝에 이흠은 북량군을 격파해 수급 7,000여 개를 얻었고 저거몽손은 고국으로 도주했다. 418년 9월, 저거몽손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서량을 침범하자 이흠은 출전하려 했지만, 좌장사 장체순(張体順)의 간언을 받아들여 멈추었고, 저거몽손은 별다른 전투없이 서량의 곡식만 수확해 돌아갔다. 이흠은 아버지 이고 대부터 시작한 [[동진]]에 칭신(稱臣)하는 정책을 계승하여 동진의 [[안제(동진)|안제]]로부터 주천공(酒泉公)으로 봉해졌다. 이흠의 치세는 형벌이 엄격했으며 이흠 본인이 무리한 궁궐 건축을 선호하기도 했기에 중랑 장현(張顯) 등의 신하들이 그 규모를 줄일 것을 권유했으나 이흠은 이때마다 언짢아하며 무시했다. 420년, 동진의 제위를 찬탈한 [[무제(유송)|유유]]가 유송을 건국하고 이흠에게 조서를 내려 고창등7군제군사, 정서대장군, 주천공에 봉했다. [[북량]]은 선비 [[걸복부]]의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西秦)을 공격하는 척하여 서량을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는데, 이흠은 이에 넘어가 저거몽손이 없는 틈을 타 북량을 차지할 생각으로 즉시 친정을 결심했다. 숙부인 우장사 송요와 좌장사 장체순이 적의 함정일 수 있으니 친정만은 하지 말아달라며 간곡히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어머니인 태후 윤씨도 가세하여 아들을 타일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에 절망한 숙부 송요는 결국 대세가 져버렸다며 탄식했다. 이흠이 보•기 30,000명을 거느리고 주천에서 나와 동쪽으로 진격했다. 저거몽손은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은 서진을 공략하기 위해 황곡(黄谷)으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또 흘렸다. 거짓 첩보를 들은 이흠은 의심없이 군사를 이끌어 북량의 영토 깊숙이 도독간(都瀆澗)까지 들어갔다. 이흠의 서량 군대가 회성(懷城)에 이르렀을 때 저거몽손이 북량의 군대를 이끌고 나와 서량군을 습격했고, 예상치 못한 저거몽손의 등장에 놀란 이흠은 대패했다. 주위의 장수들이 이흠에게 도망치라고 권했지만 이흠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저 [[저거몽손|오랑캐 녀석]]을 베어죽이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노모(老母)를 뵐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잠시 뒤로 물러난 뒤, 요천(蓼泉)에서 저거몽손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저거몽손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이흠이 전사하자 통수권자가 날아가버린 서량은 제대로 된 군사 행동을 보여주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고, 저거몽손이 신속히 도성인 주천을 공략해버리니 서량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이흠의 동생인 주천태수 이번(李翻)과 신성태수 이예(李預), 영우림군우감 이밀(李密), 좌장군 이조(李眺), 우장군 이량(李亮) 등은 도성이 함락될 때 성을 빠져나와 [[이순(서량)|이순]]이 있는 둔황으로 도망쳤다. 이들은 후계로 이순을 옹립했으나 세력이 약소하여 이후 이순 즉위 1년 만인 421년에 둔황까지 함락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 여담 == 후주 이흠의 여동생이었던 이경애(李敬爱)는 미모가 매우 빼어나, 420년에 주천이 함락되었을 때 [[저거목건]](沮渠牧犍)이 포로로 잡힌 그녀의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정실로 받들었을 정도였다. 훗날 저거목건이 북량의 왕위를 계승받았을 때 왕후에 올랐지만 그녀의 끝 역시 자신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좋지 못했다. [[북위]]의 제3대 세조 [[태무제]] 탁발도가 저거목건에게 자신의 여동생인 무위공주 탁발씨를 왕후로 들이게 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저거목건은 당시 강성했던 북위의 압박에 못이겨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거목건은 이경애를 고향인 주천으로 돌려보내니, 그녀는 홀로 슬퍼하며 답답해하다가 얼마 안가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 저거목건은 무위공주를 왕후로 들일 당시 형수인 이씨와 통간하고 있었는데 무위공주에 질투심을 느낀 이씨가 무위공주를 독살하려고 했다. 다행히 태무제가 어의를 신속하게 보내 무위공주를 살렸지만 중독의 후유증이 심각하게 남았다. 여동생이 갑자기 독살당할뻔 했으니 태무제는 대노하여 이씨를 북위로 압송하라고 명령했지만 저거목건이 거절했다. 이에 북위는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고, 북위보다 세력이 약소했던 북량은 금세 멸망당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399년 출생]][[분류:420년 사망]][[분류:딩시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