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전주 이씨 임해군파]][[분류:1636년 출생]][[분류:1666년 사망]] ||<-7><:><#00569F> '''[[전주 이씨|[[파일:전주 이씨 종문.svg|width=30]]]] {{{#f5e6cb 전주 이씨 임해군파의 종주}}}''' || ||<:> 2대 [[양녕군|양녕군 이경]] ||<:> {{{+1 ←}}} ||||<#00569F><:>'''{{{#f5e6cb 3대 익풍군 이속}}}''' || {{{+1 →}}} ||<:> 4대 [[임원군|임원군 이표]] || ---- ||<-3><#94153E> {{{#gold '''조선 선조의 증손'''[br]{{{+1 '''익풍군 | 益豐君'''}}}}}} || ||<-2><#94153E> '''[[봉호|{{{#gold 봉호}}}]]''' ||<(> 익풍군(益豐君)[* 봉호는 [[경기도]] [[화성시|화성]]에 있던 남양군(南陽郡)의 옛 지명 익주(益州)에서 유래했다.] || ||||<:><#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94153E> '''[[이름|{{{#gold 이름}}}]]''' ||<(> 속(涑) || ||||<:><#94153E> '''{{{#gold 생부}}}''' ||<(> [[양녕군|양녕군 이경(陽寧君 李儆)]] || ||||<:><#94153E> '''{{{#gold 생모}}}''' ||<(> 현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 ||||<:><#94153E> '''{{{#gold 부인}}}''' ||<(> [[조(성씨)#s-2.1|임천 조씨]](林川 趙氏)[br][[임(성씨)#s-3|풍천 임씨]](豐川 任氏) || ||||<:><#94153E> '''{{{#gold 자녀}}}''' ||<(> 2남 1녀 || ||||<:><#94153E> '''{{{#gold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 ||<|2><:><#94153E> '''{{{#gold 생몰[br]기간}}}''' ||<:><#94153E> '''[[음력|{{{#gold 음력}}}]]''' ||[[병자|병자년]] [[3월 25일]] ~ [[을사|을사년]] [[12월 5일]] || ||<:><#94153E> '''[[태양력|{{{#gold 양력}}}]]''' ||[[1636년]] [[4월 30일]] ~ [[1666년]] [[1월 9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왕족. [[선조(조선)|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손자이자 선조의 서장남 [[임해군]]의 [[양자(가족)|양손자]]이다. == 생애 == [[1636년]](인조 14년) 4월 30일[* 음력 3월 25일.]에 태어났다. 1650년(효종 1년) 2월 3일[* 음력 1월 3일.]에 ‘익풍군(益豐君)’으로 봉해졌다.[[http://sjw.history.go.kr/id/SJW-B01010030-01800|#]] 1658년(효종 9년) 8월 17일[* 음력 7월 19일.]에는 [[군관]]을 난타하여 추고받았다.[[http://sjw.history.go.kr/id/SJW-B09070190-01100|#]] 1661년(현종 2년)에는 종2품 중의대부로 품계가 올랐다.[[http://sjw.history.go.kr/id/SJW-C02050180-01300|#]] == 사망 == 1666년 1월 9일[* 음력 을사년(현종 6년) 12월 5일.]에 사망했다. 향년 30세.[*A]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성묘(공빈김씨묘)|공빈 김씨 성묘]][* 익풍군에게는 법적 증조할머니이다.] 근처에 있다. == 가족과 후손 == [[조(성씨)#s-2.1|임천 조씨]] 조시형(趙時馨)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다. 조씨부인과는 1657년(효종 8년)에 사별했고, [[임(성씨)#s-3|풍천 임씨]] 임좌(任座)의 딸과 재혼했다. 임씨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고, 측실 사이에서 1남을 두었다. 익풍군 사후인 1666년(현종 7년) 7월[* 음력 6월] 무렵에, 임씨 부인이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바로 익풍군이 생전에 아끼던 여종의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익풍군과 사랑을 나누었던 여종이 성격이 사나운 임씨 부인을 두려워해 다른 집에 가 숨었는데 이를 안 임씨 부인이 수많은 노비들을 데리고 여종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가 밧줄로 목을 맨 다음 끌고 돌아와 참혹한 벌을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707026_002|#]] 그리고 익풍군이 죽자 여종은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두려워 달아났는데, 이를 안 임씨 부인이 격노하여 여종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잔혹하게 죽이고는 시신을 [[한성부|도성]] 안에 버렸던 것. 정언 김징이 [[현종(조선)|현종]]에게 아뢰어 이 사건이 밝혀졌고, 현종은 임씨 부인의 종을 잡아다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ra_10706018_001|#]] 그 과정에서 임씨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호조판서]] 조한영이 조사하는 형조의 관리들에게 거칠게 욕설을 하여 파직당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706030_001|#]] 결과적으로 임씨 부인은 큰 벌을 받지는 않은 듯 하며, 그 이듬해인 1667년(현종 8년) 4월 25일[* 음력 4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녀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김수항]]의 넷째 아들 [[김창업]](金昌業)과 혼인했다. 참고로 김창업의 형이 [[노론|노론 4대신]] 중의 한 명인 [[김창집|김창집(金昌集)]]이다. 즉, 김창집의 제수가 익풍군의 딸이다. 익풍군의 장남은 [[임원군|임원군 이표(林原君 李杓)]]이고, 서장남은 임흥부수 이기(林川副守 李機)이다. 임원군과 임흥부수는 각각 아들을 3명, 2명을 두었으나, 이들도 아들이 1명 내지 2명인데다, 이들의 자손들마저도 대부분 아들을 1명 내지 2명 낳아서[* 오죽하면 임원군의 아들 대 이후로 아들 3명 이상 낳은 경우를 찾으려면 '''헌종, 철종 시기까지''' 가야 하고, 임흥부수 계열에서는 '''고종 때까지도 독자 아니면 2남을 유지했다.'''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1%5E%EC%9E%84%ED%95%B4%EA%B5%B0%ED%8C%8C%5E%EC%9E%84%ED%95%B4%EA%B5%B0%ED%8C%8C|출처: 《선원속보 - 선조대왕자손록 권1: 임해군파보》]]] 현재 남아있는 익풍군의 후손들 수는 굉장히 적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양녕군, version=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