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76_innocenzo_III.png|height=125]] || || 제175대 [[첼레스티노 3세]] || → ||<#806600> '''{{{#FFF 제176대 인노첸시오 3세}}}''' || → || 제177대 [[호노리오 3세]] || [[파일:Pope_Innocent_III_(Monastery_of_Subiaco).jpg|width=400]] * [[라틴어]]: Innocentius III * [[이탈리아어]]: Innocenzo III * [[영어]]: Pope Innocent III * 생몰년: 1161년 ~ [[1216년]] [[7월 16일]] * 재위기간: [[1198년]] [[1월 8일]] ~ 1216년 7월 16일 [목차]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 == 개요 ==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이다. 본명은 '로타리오 디 세니'(Lothario di Segni)이며,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에 선출되어 92살에 사망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교황이 되기전 == 1161년 태어난 로타리오는 1190년 무렵 외삼촌 [[클레멘스 3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198년 1월 8일 첼레스티노 3세가 사망하자 그날 거행된 장례식 직후 바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다. 로타리오는 [[로마]], [[파리(프랑스)|파리]], [[볼로냐]] 등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신학]]과 [[법학]]에 조예가 깊었고, 달변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외모도 준수했다고 한다. [[교황]]이 되기 전 1195년 무렵에 몇 편의 논고를 썼는데, <거룩한 제단의 신비에 대해서(De sacrosancti altaris mysterio)> 등이 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고에 그에 대한 많은 차용을 했다. == 교황이 된 이후 ==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한 최초의 교황이며, 이는 그만큼 교황권이 무소불위의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젤라시오 2세]] 교황에 대해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이 이 칭호를 사용해 언급한 적이 있으나, 공식적인 교황의 칭호로써 사용을 확립한 이는 인노첸시오 3세가 처음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묘한 배후조종과 파문을 번갈아 써가며 [[독일]] 정치에 개입해 자기 뜻대로 [[프리드리히 2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는 1212년 12월 9일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3년 뒤 [[아헨]]에서 다시 대관식을 치러 [[로마왕]]으로 인정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제관은 인노센시오 사망 후인 1220년 11월 22일에 그의 후임 호노리오 3세로부터 정식으로 받게 된다.][* 어릴 때부터 후견인 자격으로 프리드리히를 '보호'하고 마침내 황제로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인노첸시오 3세는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거대한 판도도 [[교황]]의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가 사망한 뒤의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 교황과 황제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독일 왕권 분쟁만이 아니라 인노첸시오 3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 왕]]에게도 간섭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임을 둘러싼 논쟁 끝에 존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 왕과 연합하여 전쟁에 자신이 없던 존 왕을 위협했다. 결국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의 위협에 굴복해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의 봉토로 바치고 이를 다시 수여받음으로써 스스로 교황의 [[제후|봉신]](封臣)이 되었으며, 봉신의 의무로 매년 1,000 [[파운드]]의 세금까지 납부하기로 약속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분노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의 결과가 바로 1215년 [[마그나 카르타]]의 체결이다. 한편, 이렇게 당한 전례가 있어 이후의 잉글랜드 왕들은 교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군주들의 문제에 대한 개입 외에도,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는 신앙적으로 중요한 일이 많았다. 남프랑스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신앙운동은 정통 교회를 거부[* [[카타리파]]는 [[영지주의]]를 주장하여 육신은 사악한 것이며 세상을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구조로 보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보다 [[마니교]]에 가까웠다. 비슷한 주장을 한 [[정교회]]의 이단 교파가 9세기의 [[바오로파]] 및 카타리파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보고밀파]] 였다.]하여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08년 교황 사절 피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남프랑스의 '''반(反)교황 세력인 카타리파를 처단'''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 자정(自淨)의 필요성도 인식, 1210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인준하고 순회 설교의 권리도 인정하여 어느 정도 교회의 자정을 위한 노력도 실시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 때 허가되었다. 더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령|로마]]를 중심으로 전례 규정을 통일하는 관습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인노첸시오 3세의 강력한 후광 덕분에 13세기를 지나면서 로마에서 유효한 것은 거의 법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으며, 인노첸시오 3세가 교황에 오르기 전 부제급 [[추기경]] 시절에 작성한 논고들도 13세기의 모든 전례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 책은 주로 색과 상징에 관해서 논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논고 <거룩한 제단의 신비에 대해서>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면 미셀 파스투로, 주나미 역, <서양중세상징사>의 169페이지를 참고하면 좋다.] [* 13세기에 이루어진 전례 통일화 규범은 아비뇽 유수 시대에 후퇴하게 되는데,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전례에 대해 논의하고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이 나온다(1570). 정확히 로마의 규범이 각 지역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이 책이 나온 이후이고, 13세기의 전례 통일화는 그러한 규범이나 규칙이 생긴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받아들여지던 경향성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1215년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신성 로마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 새로운 십자군 원정 계획은 1217년 결실을 보아 명목상 [[예루살렘]] 왕인 [[장 드 브리엔]]의 지휘하에 1218년 시작되었지만 [[이집트]] 공략에 실패하여 좌절되었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성직자)|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외에 인노첸시오 3세 때의 유명한 사건은 '''[[제4차 십자군 원정|제4차 십자군]]의 탈선'''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한 뒤 [[라틴 제국]]을 세우는 것(1204)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스]] 교회를 무력으로 짓밟아 굴복시킨 뒤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인의 교회가 세워졌기에 그리스인들의 증오심은 대단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어쨌든 동서방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자평했다. 교황 스스로 말하길 "[[콘스탄티노플]]이 좀 더 빨리 [[라틴|라틴인]]의 손에 들어 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호르스트 푸어만,『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161쪽 참조.] 다만 당시 교황이 전해들은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에 굴복했다는 소식 정도였고, [[엔리코 단돌로]]가 사망하고 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이후에는 '파멸의 한 사례에 불과하며 지옥의 과업'이라는 평가로 수정했다. 라테라노 공의회를 끝낸 뒤 교황은 1216년 7월 16일, 새로운 십자군 원정에 대한 조율을 위해 머물던 [[페루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기타 == [[결투 재판]]을 금했다. 현 벨기에 출신의 성녀 루트가르다에 의하면 사망 직후 [[연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봤다고 한다. 지옥에 갈뻔한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4차 십자군 때문인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물에선 베네치아와 같이 쌍으로 좋은 대우를 못 받는다. 그나마 진실을 전해 듣곤 4차 십자군을 지옥의 과업으로 평한 덕인지 그나마 대놓고 멸망은 안 당하지만 권위가 제대로 실추되는 경우가 많다. [[분류:교황]] [[분류:십자군 전쟁/관련인물]][[분류:1161년 출생]][[분류:1216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