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80대 교황[br]{{{+1 인노첸시오 4세}}}[br]Innocentius IV}}}'''}}}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ope_Innocent_IV.jpg|width=100%]]}}}|| || '''제호''' ||인노첸시오 4세 (Innocentius IV) || || '''본명''' ||시니발도 데 피에스키 (Sinibaldo de Fieschi) || ||<|2> '''출생''' ||[[1195년|1195년경]] || ||[[파일:제노바 시기.svg|width=25]]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또는 마나롤라 || ||<|2> '''사망''' ||[[1254년]] [[12월 7일]] (59세) || ||[include(틀:국기, 국명=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 || '''재위기간''' ||[[1243년]] [[6월 25일]] - [[1254년]] [[12월 7일]] (11년)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Innocentius PP. IV[br][[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V[br][[영어]]: Pope Innocent IV || [목차] [clearfix] == 개요 == 180대 [[교황]]. == 생애 == 라바냐 백작 우고와 베아트리체 그릴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르마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잠깐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교회법 학자로 명성을 얻어 [[교황청]]의 법률가로 근무했고, 1227년에 교황청 부상서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첼레스티노 4세]]가 선출된지 20일도 채 안돼 선종했으나, 추기경들의 봉쇄 선거 거부 및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응하는 문제 등으로 1년 반가량 지체된 끝에 피에스키가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즉위한 이후 실질적인 전임자인 전전임자 [[그레고리오 9세]]가 견지했던 반 황제 정책을 지속했다. 이 문제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롬바르디아]]의 겔프당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교황령]] 내에서 교황의 입지가 불안정해지자 [[로마]]를 떠나 [[피렌체]]를 거쳐 [[프랑스 왕국]] [[리옹]][* 이때 조카인 베아트리체 피에스키와 결혼한 [[피에몬테]] 영주 토마소 2세의 일가인 [[사보이아 가문]]의 도움을 받았고, 토마소 2세의 막내 남동생 [[필리포 1세|필리프]]를 리옹 대주교로 임명하여 보답했다.]으로 망명했고, 제1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해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 폐위시키고 독일 제후들을 선동했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계속된 [[파문]]과 복권에 질린 독일 제후들은 교황권의 신장도 바라지 않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도 프리드리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생각 외로 황권에 위협은 되지 못했다.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제권과 제후(영주)권, 교황권의 균형 위에 서 있는 나라였고 제후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봉권적 권력을 억압하는 황제에 맞서기 위해 교황과 협력하였으나, 그렇다고 제후들이 덮어놓고 교황 편을 든 것은 아니다.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 역시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파문]]이 지나치게 남발된 것 자체가 교황과 교회가 지나치게 세속 군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하고도 황제를 제압하지 못하고 번번히 교황이 역으로 털린 상황이었기에, 당시 독일 제후들이 황제에게 등 돌리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은 [[1250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이후 어느정도 수습되었다. 페루자(1251~1253)를 거쳐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계속해서 강경한 반 [[호엔슈타우펜 가문]] 노선을 견지했고,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이 된 [[만프레디]]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 [[나폴리]]에 입성하였으나 포자에서 조카 굴리엘모 피에스키 추기경이 이끌던 교황군이 참패하자 충격을 받아 1254년 12월에 [[나폴리]]에서 선종하였다. 한편 [[몽골 제국]]에 카르피니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교황은 카르피니 등을 통해 '침략행위를 그만두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과 '[[헝가리 왕국]]을 [[모히 전투|침략]]한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당시 몽골 제국을 다스리던 [[귀위크 칸]]은 이에 대한 답장에서 "네 요구를 둘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하며, "[[헝가리인]]은 [[칸]]에게 복종하라는 신의 명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우리에게 정복되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 이는 몽골에서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팍스|강자의 평정 아래에 분쟁을 유발할 적대자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또한 1251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리투아니아]] 대공인 [[민다우가스]]가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자 그를 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책봉했다. [[수도자]] 개개인은 청빈을 요구받지만 [[수도회]] 운영상 재산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대에 [[법인]] 개념으로 이어지는 Persona ficta 개념을 처음으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조카 오피초는 인노첸시오 4세의 선출 직후 [[라틴 총대주교#s-3.1|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가 되었고, 다른 조카들인 굴리엘모와 오토부오노는 추기경이 되었다. 이 중 오토부오노는 훗날의 [[하드리아노 5세]]이다. == 둘러보기 ==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80_innocenzo_IV.png|height=125]] || || 제179대 [[첼레스티노 4세]] || → ||<#806600> '''{{{#FFF 제180대 인노첸시오 4세}}}''' || → || 제181대 [[알렉산데르 4세]] ||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프리드리히 2세, version=149, title2=귀위크 칸, version2=143)] [[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1185년 출생]][[분류:1254년 사망]][[분류:제노바 출신 인물]]